다이아몬드는 사치재다. 없어도 먹고사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가격은 매우 비싸다. 이러한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다이아몬드는 금처럼 환금성을 갖지 못한다.
다이아몬드 산업의 발전을 보면 세계경제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항해시대, 산업혁명시대, 제국주의시대를 거쳐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다이아몬드는 사치재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다이아몬드의 산출지도 이 같은 궤와 같이한다. 인도, 브라질, 아프리카, 세계각지의 산출로 이어지는 다이아몬드 산출지의 변화를 알아보자. (표지, 러시아 미르 다이아몬드 광산)
다이아몬드의 지질학
우선 다이아몬드는 아무 데서나 산출되지 않는다. 탄소덩어리인 다이아몬드는 흑연과는 다르게 탄소가 지하 160km 이하의 깊은 땅속에서 높은 압력과 온도를 받아 생성되는 광물이다. 맨틀 내에서 형성된 다이아몬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지표면에 그야말로 총알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킴벌라이트 파이프(kimberlite pipe)라고 불리는 화성암의 분출구이고 자체에서 나오거나 여기서 풍화침식된 것이 주변 퇴적지형에 쌓인 후 발견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곳은 인도이다.
Kimberley Mine Section, 1905, source: wikimedia commons by Gardner F. Williams
인도
프랑스의 여행가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1605~1689)는 여섯 번의 인도여행을 했는데, 마지막 여행에서 푸른색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왔다. 무려 112 캐럿의 이 다이아몬드는 당시 프랑스 왕인 루이 14세가 89만 8,731 리브르에 구입했다. 이게 그 유명한 '호프 다이아몬드(Hope Diamond)'이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만들면서 현재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있다.
호프 다이아몬드, source: wikimedia commons by David Bjorgen
이후 인도산으로 유명한 '코이 누르(Koh-i-Noor) 다이아몬드'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14세기초에도 존재했고, 무려 186캐럿이었다고 한다. 1851년 영국 런던 박람회에 소개되어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이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절삭해서 105.6캐럿이 되었고 엘리자베드 여왕의 어머니가 쓰던 왕관을 장식했다. 이 왕관은 2023년 5월 찰스 3세 대관식 때 카멜라 왕비가 쓰냐 마냐를 놓고 이야기가 많았지만 결국 쓰지 않았다. 현재 런던탑에 보관되어 있다.
인도의 다이아몬드 산지, 출처 : 다마키 도시오
이처럼 18세기 중반까지 원석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곳은 인도가 유일했다. 7세기에 중요한 광물로 자리 잡았고, 17세기부터 관련 사업이 활황을 맞았다. 산출지는 주로 골콘다를 중심으로 한 남인도에 많았으나 북인도에서 산출되었다. 유럽에 인도 다이아몬드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497년 바스쿠 다가마가 캘리컷(현재의 코지 코트)에 도착한 후부터이다. 지중해산 산호와 교환무역이 되면서 무역량이 증가하였다.
인도 골콘다의 다이아몬드 광산 그림, Source: wikimedia commons by Isaac Taylor,
브라질
1903년 브라질 광산촌의 전경, source: wikimedia commons by Olaf Edward Ray
1725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미나스제라이스주에서 빛나는 물체가 발견되었다. 리스본으로 가져가 감정을 해보니 다이아몬드였다. 1730년 포르투갈 왕실은 이 지역을 소유한다고 공표하고, 면허를 받은 이만 합법적인 다이아몬드 채굴을 하게 했다. 1840년대에는 산출량이 20만 캐럿에 달했고, 1870년대에는 독보적인 세계 제1의 산출국이 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이 넓은 브라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고, 밀수가 성행하여 다이아몬드 가격이 70~80% 하락하게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구매력이 증가했음에도 1800년도 후반 유럽의 분쟁(크림 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등으로 수요가 다시 줄어들면서 가격이 하락하는 등 시장관리가 되지 않았다.
브라질의 연간 다이아몬드 산출량 추계(1730~1822), 출처 : 다마키 도시오
아프리카
1867년 남아프리카 킴벌리의 오렌지강 제방에서 한 소년이 작고 투명한 돌 2개를 발견했다.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순간이었다. 이 다이아몬드는 '유레카 다이아몬드'로 이름 붙여졌다. 1870~1880년대 많은 유럽인들이 킴벌리에 몰려들었고 이를 '다이아몬드러시'라고 한다. 1871년 5월 드비어스 형제가 소유하던 현재의 도토이스판 광산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된다. 형제는 1873년 이 광산을 영국인 세실 로즈에게 6천 파운드(현재 가치로 65만 달러)에 팔았다. 오늘날 드비어스(De Beers)의 시작이었다.
Diamond mine with workers at Kimberley, South Africa, 1896. source: wikimedia commons
남아프리카 여기저기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1872년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브라질의 6배가 넘을 정도로 막대했다. 1887년 산출량 추정은 300만 ~600만 캐럿이라고 한다. 로즈는 다이아몬드 산출증대에 따른 가격하락을 막기 위해 주변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적극적으로 매입하였다. 1889년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의 90%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자본 로스차일드가 지원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902년 세실 로즈가 죽고 뚜렷한 지도자가 없던 드비어스는 1929년 에르네스트 오펜하이머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달라졌다. 막강한 시장 지배력으로 소규모 광산을 영향력 아래 두어 1933년 다이아몬드 산출자 협회를 설립해서 전 세계 다이아몬드 공급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아프리카 주변국에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시에라리온, 앙골라, 코트디부아르 등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는 반정부 세력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 채광되면서 내전과 인권피해를 일으키는 자금줄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를 '브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라고 한다. 시에라리온의 상황을 디카프리오가 주연으로 영화화되기 돼 했다. 이를 계기로 원산지를 표시하는 킴벌리프로세스가 만들어졌다.
Diamond miners panning in the Kono District of Sierra Leone, source: wikimedia commons by USAID
러시아 등
냉전이 시작되자 당시 소련은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다이아몬드 채굴에 눈독을 들였다. 마침 1953년 시베리아 동부 야쿠티아(현 사하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955년 미르니 광산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채굴에 들어갔다. 1962년 소련은 전량을 드비어스에 팔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200만 캐럿에서 1978년에는 1,000만 캐럿이나 되는 막대한 양이 수출되었다. 이들이 인공 다이아몬드도 생산하기 때문에 증가하는 물량에 대해 의구심이 커져만 갔다. 현재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수출국이며 이 돈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밖에서 캐나다와 호주 등지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어 생산국은 점점 늘어났고 드비어스의 장악력은 날로 떨어졌다. 결국 오펜하이머 가문은 2011년 11월 앵글로아메리칸에 경영권을 넘겼다. 다이아몬드 산업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Aerial view of Mirny city, Mir mine and Mirny Airport, Igor Dvurekov
The defunct Jericho Diamond Mine, Nunavut, Canada. source: wkikmedia commons by Tom Churchill
The open pit of the Argyle Diamond Mine near Kununurra, Australia, source: wiki com. by Tom Backus
산출국별 다이아몬드 생산 추이, 출처 : 다마키 도시오
인공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그 성분과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게다가 드비어스가 시장을 지배해 가격이 높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 매력적인 시장으로 여겨졌다. 1953년 스웨덴의 전기기기 회사인 ASEA는 유압식 고압 프레스를 개발하여 다이아몬드 결정 제조에 성공했다. 1954년에는 미국의 GE가 더 강력한 프레스를 개발하여 합성다이아몬드 제조에 성공했다. 1970년 1캐럿 이상의 인조 다이아몬드 제조에 성공하면서 장신구에 사용할 만한 품질의 다이아몬드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프라즈마를 이용하여 보다 낮은 압력과 온도에서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었거 이를 '랩그로운 다이아몬드(LGD: Lab Glown Diamond)'라고 한다. 결국 드비어스도 인공 다이아몬드로 제품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LGD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글에 소개한다.
참고문헌
1. 그림에서 보석을 읽다, 원종옥, 이다미디어, 2009
2. 다이아몬드 잔혹사, 그레그 캠벨, 작가정신, 2004
3. 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윤성원, 시그마북스, 2015
4. 한 권으로 읽는 욕망의 역사 다이아몬드의 세계, 다마키 도시아키, 미래타임즈,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