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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Dec 13. 2023

모스 & 부호 이야기

생활 속 과학 이야기 - 전보 2부

[ 우리나라 전보서비스를 담당하는 KT는 2023년 12월 15일부터 전보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138년을 이어오던 전보의 중단을 맞아 전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


전보(電報, telegraphy)는 전신을 이용한 문서의 배달 서비스를 의미 한다. 일반 우편을 통한 편지보다 더 빠르게 전달할 수 있다. 전화가 보급되기 전에는 주변 사람이 위독하거나 할 때 긴급 연락 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1960년대의 전화, 1980년대의 팩스, 1990년대 후반의 휴대전화, 인터넷, 전자 우편가 일반화 되면에 벌써 긴급 연락으로의 용도는 사라졌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1809~1865)의 당선(1861) 소식이 서부에까지 전달되는 데는 8일이 걸렸으나 5년 뒤 암살(1865) 소식은 실시간으로 전국에 전해졌다. 전보망는 그만큼 빠르게 세상에 깔렸고,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모스 송수신기, source: wikimedia commons by public domain


모스 신호

Chart of the Morse code letters and numerals. @Public domain

모스 부호( - 符號, 영어: Morse code)는  짧은 신호(·, 점 또는 단점)와 긴 신호(-, 선 또는 장점)를 적절히 조합하여 문자 기호를 표기하는 규약이다. 물론 점 1개 정도의 공백(침묵)을 추가하는데 이는 음악이 음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이치와 같다. 로마자와 숫자 또는 한글 자모를 표기한다. 당연하게도  사용빈도가 높은 문자(예: e)일수록 신호가 간단(·)하다. 비용을 줄이고 해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단어전체를 보내는 게 아니고 주로 모음을 빼고 보낸다. 물론 이 약속은 사전에 정해진다. 예를 들어 'as  soon  as  possible '이라는 단어는 'asap'라고 쓴다.


영어로는 각각 dit과 dah로, 우리나라는 한반도에서는 점을 '돈(トン)', 선을 '쓰(ツー)'라고 읽는데, 일본에서 쓰던 말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SOS는 ㆍㆍㆍ _ _ _ ㆍㆍㆍ으로  쓰고 돈돈돈 쓰쓰쓰 돈돈돈으로 읽는다. 이걸 연속으로 치면 SOSOSOSO...로 들리니 눈치껏 해석하면 된다.


신호는 소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종이에 인쇄하여 해석한다(해상에서는 써치라이트를 이용하여 일광신호로 모스부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자석(릴레이)에 얼마나 오래 전류를 흘리는 것인가에 따라 신호를 구분하여 발신하고, 수신부에서는 이를 반대로 작동시켜 수신하는 것이다. 물론 전기의 저항 때문에 멀리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했다.


모스 코드가 개발되어 조작자들이 종이테이프에 적힌 자국을 텍스트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초기 코드에서 모스는 숫자만을 전송할 계획(8282 같은  삐삐문자의 시초가 될 뻔했다)이었다. 그러나 이 코드는 앨프리드 베일이 일반 문자와 특수 문자를 포함, 확장시켰고 일반화되었다.


로마자에 대한 부호는 영리하게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글자일수록 가장 짧고 간단한 부호가 되도록 정했다. 즉 많이 사용되는 글자일수록 타전하기 편하도록 할당 부호가 짧은 것을 사용했다. 모스 부호의 길이가 짧은 것부터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e i t a n s d h m r u b f g k l v w c j o p x z q y 가 된다(아래 사진 참조).


한글 전신 부호는 1885년 경 김학우에 의해 개발되었다. 사용 빈도와 한글 순서나 획순을 함께 고려하여 부호를 지정했다. 가장 많이 쓰는 글자인 'ㅏ'에 점(ㆍ)을 지정했고, 이에 대칭인 'ㅓ'에 선(-)을 지정했다.

'ㅑ, ㅕ, ㅜ'에 각각,  '··', '···', '····'을 지정했다. 자음은 ㄷ, ㄱ, ㄴ, ㄹ 순으로 규칙을 정해 각각 '-···, '.-··', '··-·', '···-'로 정했다.  김학우의 이야기는 다음글로 이어진다.


부호의 사용은 다음과 같은 국제 규약을 따른다.

  1. 선(dash) 길이는 점(dot)의 3배일 것

  2. 한 자(로마자 또는 한글자모 문자)를 형성하는 선과 점 사이 간격은 1점과 같을 것

  3. 문자와 문자, 문자와 기호 사이 간격은 3점과 같을 것

  4. 단어와 단어 사이는 7점과 같을 것

  5. 한글인 경우 (음절) 글자와 글자 사이는 5 단점 길이를 둔다


새뮤얼 모스( Samuel F. B. Morse, 1866년경), @public Domain , source: wikimedia commons


화가였던 새뮤얼 모스


전보의 발명자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 ~ 1872)는 뜬금없는 미국의 화가였다.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에서 출생하여, 1810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뒤, 화가가 되기 위하여 1811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제대로 했다.


<라파예트 후작>, 새뮤얼 모스, 1825, 캔버스에 기름, 29 3/4 x 24 3/4인치. 크리스털 브리지스 미국 미술관, 아칸소주 벤턴빌, public domain

1815년 귀국하여 대표작인 '라파예트 후작'(1825) 등의 그림을 그렸고 1826년 미국 화가 30명과 함께 국립디자인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1830년대 중반 워싱턴 D.C. 의 상원의사당에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벽화를 그리려고 했으나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첫 번째 아내 '루크레티아 피커링 워커'의 초상, 새뮤엘 모스, source: wikimedia commons by Internet Archive Book Images


1825년 2월 고향을 떠나 워싱턴 D.C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프랑스 라파예트 후작의 초상화를 그릴 때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온 메신저가 '아내가 아프다'는 내용의 아버지가 쓴 편지를 전했다. 모스는 황급하게 뉴헤이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첫 번째 아내 '루크레티아 피커링 워커'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다.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을 느낀 모스는 화가의 꿈을 접은 채 '어떻게 하면 소식을 빠르게,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었는데 결국 1837년 모스 전신기를 만들었다(워싱턴 D. C. 미국 국립 역사기술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음). 1844년 5월 24일 워싱턴 D.C와 볼티모어 간에 세계 최초로 전신이 공식 개통되었다. 이후 그의 전신 방식과 모스 부호는 세계적으로 채택되었으며 해저 전신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위키백과에 나오는 동화책 같은 새뮤엘 모스의 이야기이다.  


같은 사람의 다른 모습


모스가 모스 부호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맞지만,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었고, 사실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가로챈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1832년 모스는 미술공부를 하러 유럽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배 위에서 한 과학자가 전자석과 철가루로 마술 같은 일을 보여 주었다. 청중 중에 섞여 있던 모스는 이를 이용해 먼 곳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검증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전신을 발명한 사람은 물리학자이자 프린스턴 대학의 조지프 헨리(Joseph Henry, 1797~1878) 교수라고 알려졌다.  1831년에 발명했다. 그는 '전선을 통한 암호화된 전기 자극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라는, 전신의 기초적 개념을 고안했고, 장치 실용화에 필요한 필수적 구조를 모두 설계했다. 학계의 주장에 의하면 모스는 헨리의 논문 대부분을 표절했으며, 궁금할 때는 당당히 헨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한편 전기기술자인 알프레드 베일(1807~1859)도 끌어들였다. 


그러나 헨리와 베일은 일은 다 했지만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고, 그 대신 모스가 자신의 혼자의 이름으로 특허를 받았다.  훗날 모스가 전신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은 이후에도 모스는 헨리에게 진 빚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조지프 핸리가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사업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핸리는 프린스턴 대학의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스미스소니언 협회, 등대 협회에 참여했다. 의회 도서관에도 아이작 뉴턴과 함께 동상이 서있다.  어찌 되었든 모스의 행동은 배은망덕하다고 볼 수 있다. 


모스는 그리 좋은 인격자로 인정받지는 못한 듯하다. 지나치게 보수적이었고 노예제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서 당시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조부가 프린스턴 대학 학장이라 백그라운드가 빵빵하고 이름이 알려진 화가이자 영국왕립학회 회원이었던 모스가 왜 자신의 생업을 떼여치우고 전신에 뛰어들었는지는 쉽게 이해가 안 되는 미스터리이다.


그렇게 모스는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볼티모어 기차역까지 약 64km 구간에 대한 전신 가설 비용으로 3만 달러의 예산을 얻어냈고, 1844년 5월 24일 전신선이 완공됐다. 모스와 지지자들은 국회의사당의 구 대법원 판사실에 모여 모스가 모스부호를 사용해 처음으로 전신 메시지를 전송하는 시연을 지켜보았는데, 모스는 특허청장의 딸인 일곱 살 어린이에게 최초의 메시지를 부탁했고 그 어린이는 민수기 23장 23절의 구절 "하느님께서 이렇듯이 큰일을 하셨구나(what hath God wrought)"를 선택했다. 이렇게 큰일이 기술의 도둑질인지 전보의 발명을 이야기하는지는 불명확하다.


게다가 그 밖에도 모스는 파리 방문 당시 미술가이자 사진가인 루이 다게르(1787~1851, Louis Daguerre)를 찾아가 새로 발명한 사진 촬영술(다게레오타이프)을 보여달라고 집요하게 설득한 뒤, 미국에 돌아와 그 방식은 베껴서 사진을 찍고 판매하는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는가 하면, 한가할 때 연구하려고 프랑스의 시계제조자이자 기계공학자인 루이 브레게(1747~1823, Louis Breguet)가 발명한 장거리 통신에 중요한 자석을 훔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뇌물에 깡패까지 동원했던 에디슨과 비슷한 급인 듯하다.




모스는 1848년 8월 10일 뉴욕 유티카에서 두 번째 부인인 '사라 엘리자베스 그리스월드'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  모스는 남북전쟁 때 열렬히 남부를 지지했기에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나고 정치적으로 매장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편히 살다가 천수를 누렸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0년을 더 살았다. 


역사를 통해 보면, 후세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발명을 한 사람이 꼭 그 대가를 거둔 것이 아닌 경우가 가끔 있다. 제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 놈이 번다는 속담이 있다. 모스가 바로 그런 케이스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사업화를 잘 시키는 사람에게 기회가 올 수도 있다. 세상이 어지러워져도 진정으로 노력한 사람에게 그 대가가 돌아가는 세상을 기다려 본다.


참고자료


김상훈, B급 세계사 2 인물편: 알고 나면 꼭 써먹고 싶어지는 역사 잡학 사전, 2020, 행복한 작업실

로먼 마스,커트 콜스테트, 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2021, 어크로스,

위키백과 한글, 영문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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