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전보서비스를 담당하는 KT는 2023년 12월 15일부터 전보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138년을 이어오던 전보의 중단을 맞아 전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표지사진] 1930년대 일본산으로 추정되는 전건(電鍵, key). 손가락으로 둥그런 스위치를 눌렀다 떼었다 하면서 모스부호(Morse Code)를 보내 전보를 송수신하는 전보 송신기. 1960년대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사용된 것으로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중(二重) 전신용 전건. (사진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개화기 그 혼란했던 시대
개화기 선진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그리고 극도로 혼란한 시대에 김학우(金鶴羽, 1862~1894)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우선 그가 어떤 시대를 관통해서 살아 나갔는지 간략하게 알아보자.
1863~1873 흥선대원군 집권기
1876 강화도조약
1882 조미수호조약,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1883 기기국(무기, 기기), 박문국(출판사), 전환국(조폐) 설립
1884 갑신정변
1985 거문도 사건
1886 조불통상조약
1887 경복궁 건천궁 전기 도입(3월)
1888 조러육로통상조약
1892~1893 교조신원운동
1894 동학혁명, 갑오경장, 조일잠정합동조관 체결, 청일전쟁
1895 삼국간섭, 을미왜변(명성황후 시해사건)
김학우의 흔적
<전보장정>,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전보장정(電報章程)>은 1888년(고종 25년) 5월에 우리나라에서 제정한 최초의 전신규정(電信規程)을 담고 있는 문헌으로 32항의 조문과 전신부호, 요금 등이 규정되어 있다. 이 중 김학우(金鶴羽)가 만든 국문 전신부호는 국명양문첩법(局名洋文捷法)이라 하여 우리 지명의 영문식 표기와 그 약호를 제정하였고, 이어 양문자모호마타법(洋文字母號碼打法) 등에서는 「전보신편」 및 「만국전보장정」을 본떠 국제 규례를 그대로 적용하였으며, 한문 전신부호는 「기보장정(奇報章程)」에 실린 전편(電編)을 준용하였다.
어째됐건 우리가 만든 남로전신선에 사용하려고 만든 규약이었다. 조선전보총국 개국에 앞서 제정되었다. (뒤에서 자세히 소개한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최초로 한글의 기계화가 이루어진 결과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규장각에 있으며 국가등록문화재이다.
조선통신사업연혁소사(조선총독부체신국, 1914),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1914년 발행된 『조선통신사업연혁소사(朝鮮通信事業沿革小史)』에 실린 한성전보총국의 모습이다. 사진에는 ‘구한국전보총사(舊韓國電報總司)’로 기재되어 있다. 가로 7칸, 세로 3칸의 한옥에는 전신주가 얼핏 보이고 모던보이가 문가에 기대어 있다.
1885년 6월 조선은 청나라와 조청전선조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 전보망으로는 가장 먼저 인천~서울 간 전선가설 공사를 진행하였다. 한성전보총국은 이때 가설된 전선의 관리, 운용을 담당하였으며 청나라인들이 주요 요직을 맡았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표지석이 있다.
우리나라의 전보의 도입
열강들 속에 먹잇감으로 던져진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러시아가 악마의 발톱을 숨기지도 않고 조선을 공략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본국과의 원활한 통신이었다. 경쟁국의 동향을 파악하고 본국의 명령을 신속하게 집행하려면 통신과 운송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전신망과 철도망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투자를 하게 된다. 이 과정이 우리나라 전보망의 완성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남로, 북로, 서로 전신선이 깔린 1893년 당시 한반도의 전신선로도. 출처: 한겨레신문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전신망의 연결을 서둘러 1885년 6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조청전선조약(朝淸電線條約)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조선과 청나라가 합작하여, 인천을 기점으로 서울을 경유하여 청나라의 봉황(鳳凰)까지 연결하는 전선, 즉 서로전선(西路電線)을 가설하여, 청나라가 자본과 기술을, 조선이 전선가설에 필요한 전신주와 노동력, 그리고 전선 경비병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전선가설공사는 바로 착공되어, 같은 해 8월에는 인천∼서울 간 전선가설공사가 완료되어 8월 20일 개통되었고, 1885년 11월에는 서울과 의주 사이 서로전선이 일사천리로 개통된다. 이에 따라 전선의 전보업무를 총괄하기 위하여 이 한성전보총국이 설치되었다. 산하에 인천·평양·의주 분국을 두었다. 이로서 조선은 세계와 연결되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뒤편 한성전보총국 표지석, 출처: 네이버 지도
한성전보총국의 운영은 조청전선조약에 따라 청나라 측이 담당하였고, 따라서 직원은 모두 청나라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총국의 업무를 총괄하는 총판(總辦), 전선기술 및 기타 실무를 담당하는 공장(工匠)과 사사(司事), 견습생인 학생(學生)이 있었고, 분국에는 각 분국의 업무를 총괄하는 위원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도 파견되어 기술습득을 위하여 함께 견습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후 서로전선이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 최초 전신 설치 : 미국(1843, 워싱턴-볼티모어), 일본(1869, 도쿄-요코하마), 중국(1879, 텐지-다구(大沽) )
* 조선에 전화는 1896년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처음 설치
조선 전보도입의 산파, 김학우
김학우는 개항기 전운서(세곡운반을 주관하는 부처) 낭청, 내무부참의직, 법무아문대신서리 등을 역임한 관료로 분류된다.
1862년에 태어난 김학우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고(子皐), 함경북도 경흥의 토반(土班-해당지역 토착 양반) 출신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김인승(金麟昇)을 따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15세이던 1876년,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약 1년 반 동안 동경에서 우치무라[內村直義]의 무급(無給) 어학교사 자격으로 머무른 일이 있었다. 15세의 어학교사라니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간 그해 일본은 강화도를 통해 조선과 개국 조약(강화도조약, 조일수호조약, 병자수호조약)을 맺었고 이때 작은 아버지 김인승은 일본 측 자문 일원 자격으로 일본 배를 타고 왔다고 한다.
1878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변경 사무로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었던 함경도 경성(鏡城) 출신 관리로 나중에 법무대신에 오른 장석주(張錫周,1848~1921)의 주선으로 김학우는 1882년 가을 서울로 오게 된다. 당시 나이 20세였다.
김학우는 임오군란이 발생한 1882년 서울로 오게 되었고,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4년 2월 부산포에 일본전신국이 설치되어 일본이 부산과 나가사키 간에 해저 전선을 개통시켰다.
이에 자극받은 김학우가 1884년 가을, 조선도 전신을 가설해야 한다고 국왕(고종)에게 건의했고, 국왕은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를 기기국위원으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파견해서 전신에 대한 현황파악과 기술습득을 하게 했다.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어떻게 왕과 만나게 되었고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서 결정을 얻게 됐는지의 내용은 별로 알려진바가 없다.
일본에간 그는 매일같이 전신 본국을 찾아가 연구하여 전신부호를 개발하였으며, 당시 전신 기술을 배우는 동안 처음으로 한국어 모스 부호인 '조선국 전신부호'를 만들게 된다. 이때 김학우가 만든 한글 전신부호는 1888년 남로전신선을 담당하는 조선전보총국이 설립되면서 <전보장정>(위의 사진)에서 한글 전신부호의 모체로 채택되었고 이후 이 부호에 'ㅔ'와 'ㅐ'만 더 첨가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1885년 1월 26일 귀국한 김학우는 젊은이 7명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귀국해 보니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나라는 노골적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했다.
한글 모스 부호를 개발한 김학우는 엔지니어는 아니다.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으로 외국어에 능통했고, 1884년부터 1886년까지는 기기국(근대식 무기와 기기를 제조를 담당하는 관청) 위원과 전환국(조폐기관) 위원 등을 지냈다. 김학우는 이미 만주의 길림(吉林)과 중국 북경에도 드나든 적이 있어 비교적 해외사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 일본어 · 중국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마치 사리분별 잘하는 오렌지족 같은 느낌이랄까.
1884년 10월 17일에 김옥균 등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는데, 이때 개화파와 친했던 김학우는 일본에 있어서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갑신정변은 우정국 개설 축하연에서 발발하였는데, 그 후 우편, 전신은 개화기의 혼란의 유탄에 희생되게 된다. 김학우는 정변의 소용돌이와 이후 숙청에서 큰 피해 없이 살아남을 걸로 보아 기술, 통역 전문으로 혁명세력과는 거리가 있었던 듯하다.
윤치호, Source: wikimedia commons
1885년 가을에 중국 상해를 간 기록이 갑정정변 주역 중 한 사람인 상해망명객 윤치호(1865~1945)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고종의 명을 받아 총 부속품을 구입하려고 간 것으로 적혀 있다. 돈을 빌려주고 아버지에게서 받으라는 윤치호의 부탁을 공금이라고 거절한 것으로 보아 김학우는 정치적인 감각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기에는 1886년 8월 김학우가 서울에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적었고 곧이어 10월에 러시아로 간다는 소문을 기록했다. 그 이유는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凱, 1859~1916)의 미움을 받아 살해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1886년 7월 17일 '원악지정배'에 처해졌지만 25일 특별 석방됐다는 기록도 보인다.
위안스카이(1915), Source: wikimedia commons by Jindaihua
하여간 1886년 2월 서울-부산 간의 전신시설 건설을 중국이 맡기로 약정을 했으나, 김학우는 이를 우리의 힘으로 하여야 한다고 반대했다. 이에 청나라의 미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선로는 일본의 기술과 자본으로 완성된다.
1886년 8월 이른바 제2차 한러밀약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벋어나고자 러시아의 도움을 청한 사건이다. 이때 김학우는 서울에 파견된 청나라의 주차관(駐箚官) 위안스카이[袁世凱]로부터 한러밀약을 방조한 반청독립노선파(反淸獨立路線派) 인물로 지목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 및 미국 공사관측의 개입으로 곧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 뒤 전운서낭청(轉運署郎廳) · 연무공원사무(鍊武公院司務) ·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 등 개화 담당부서의 요직을 맡아 자주 일본을 내왕하면서 기선과 석탄 구입을 주선하였다. 또 국내에서는 밀어채(密漁採)와 밀무역을 막는 일에도 종사하였다. 정권을 주무르는 핵심부서는 아니지만, 기술관료로 여러 분야의 진출이 눈에 띈다.
일본은 청나라와 대결 구조 속에서 좁아져 가는 입지를 높이는 한편 1884년에 완성한 부산-일본을 잇는 해저전선에 연결할 목적으로 1888년 남로전신선(한성-부산)을 건설했다. 또 남로전신선 가설의 기술적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가 독자적인 의지로 1891년 북로전신선(한성-원산)을 가설함으로써 조선전신망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게 되었다.
어이없는 사망
청일전쟁 지도(1894~1895), source: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7월에는 갑오경장(甲午更張,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1894.7~1895.3)이 발발하자 친일개혁관료 가운데 김학우는 정계에 두각을 나타났다. 내무부참의직을 거쳐 군국기무처회의원 겸 법무아문협판 · 법무아문대신서리 등 요직을 차지하고 김홍집(金弘集) · 유길준(兪吉濬) 등과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반일세력인 대원군파의 미움을 받아 그 해 10월 31일에 흥선대원군 및 이준용파(李埈鎔派)의 자객인 전동석(田東錫) · 최형식(崔亨植) 등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구한 말 정교가 지은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김학우는 1894년 음력 10월 3일 밤 술시(8시 반경)에 법무협판 이준용의 무리의 한 사람이던 전동석의 지시에 따라 최형식 등에 의해 칼에 찔려 손님 2명과 함께 살해됐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주한일본공사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김학우의 나이는 32세였고 직위는 법무협판(法務協辦)이었으며 법무대신서리로 임명된 지 75일 만이다. 이 사건은 다음날 의정부가 고종에게 보고하여 수사가 진행되었다. 김학우는 순종 3년에 정 2품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고 이후 헌민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이준용(1917), source: wikimedia commons by public domain
배후로 지목되는 이준용은 대원군의 손자인데 문약하던 아버지 이재면보다는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닮았다고 평가된다.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 되자 추종자 세력 중 일부가 테러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이전에 대원군이 편지로 그에게 인사청탁을 하였으나 김학우가 군국기무처에서 '이 어른이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군!"이라고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개화파가 수구파에 의해 암살됐다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고종실록 33권).
정리하면 구한 말의 김학우는 최초의 한글 전신부호를 고안한 발명가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862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그는 갑오경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32세로 암살을 당했다. 러시아어, 중국어, 일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중국, 일본 등 해외를 왕래하면서 전신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한글 자모의 모르스 전신부호를 만들어 1891년 북로전신선을 개통에 공헌한다.
김학우에게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학문적 기초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급속한 개방화의 흐름 속에 선진 문물을 흡수할 어학적인 능력과 원만한 인간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안타깝게도 32살에 암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출중한 능력도 격랑기에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참고문헌
1. 최초의 한글 전신부호 고안 김학우, 박성래, 과학과 기술, 1999년 1월, Vol 356,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