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전보서비스를 담당하는 KT는 2023년 12월 15일부터 전보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138년을 이어오던 전보의 중단을 맞아 전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전보는 전기신호를 전선이나 무선을 통해 보내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매개체가 중요한데, 초기부터 전선이 독보적이었다. 사실 지금이 무선시대처럼 보이지만 인터넷을 구성하는 망이 대부분 전선이고 해저케이블로 대륙간 연결을 하니 아직 유선의 시대인 것이다.
전봇대의 기원은 정확히 기록된 것은 없지만 전보의 시작과 함께 한 듯하다. 1843년 새뮤엘 모스는 의회에서 3만 달러의 예산을 배정받아 워싱턴 D.C.의 의사당 건물에서 볼티모어 기차역까지 전봇줄을 지하에 매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은 자주 끊어졌다. 마감일은 다가오고 돈도 부족해지자 지하에 묻은 줄을 파내 나무와 기둥에 주렁주렁 걸었다. 이제 전선은 온전했고 수리하기도 좋았다. 마침 미국에는 전봇대로 쓸 수 있는 나무가 넘쳐 났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이 방식으로 수천km의 전봇줄이 연결되었다. 다른 설로는 1843년 전보의 선구자 '윌리엄 포터길 쿠크'가 영국 대서부 철도를 따라 선을 연결하기 위한 기둥을 처음 사용하였다는 설도 있다.
전보는 사라져도 전봇대는 남는다
Telegraph pole and church, Chulmleigh, Source: wiki Comm. by Derek Harper
우리가 흔히 보는 전봇대(電報-, Utility Pole) 혹은 전신주(電信柱)는 전선이나 통신선을 잇기 위한 기둥을 말한다. '전봇대'라는 말은 '전보(電報)'에서 온 말이고 '전신주'의 '전신' 도 전신(電信)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에는 그 전선으로 전보나 전신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옛날 이름이 굳어진 경우이다.
흔히 전신주, 전주(電柱), 통신주(通信柱)라고도 구별없이 불리나 이 셋의 뜻은 차이가 있다. 전력선만 가설되어 있는 것을 전주, 통신선만 가설되어 있는 것을 통신주, 전력선과 통신주가 같이 가설되어 있는 것을 전신주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cable TV, 인터넷선 등 여러가지가 같이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에는 주변 환경에 대한 전선의 미적 문제, 그리고 많은 눈이나 얼음이 쌓이는 지역의 안전 문제 등으로 인해 지중화 배전관로가 전봇대의 대안으로 사용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봇대
한국에 전봇대가 도입된 초기에는 나무 재질이었으나, 이후에 콘크리트·철 재질(CP주)로 바뀌었다. 이제 목제 전봇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1980년대 이후 지중화사업을 통해 아예 전봇대가 없는 시가지와 신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전봇대 번호(전주번호찰)를 이용해 긴급한 상황에서의 위치 찾기를 할 수 있다.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대한민국에서 전주는 한국전력공사에서 설치 및 소유·관리한다. 한전만 설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한전주가 없거나, 하중, 안전 등 이유로 기존 전주에 신규 케이블을 더 올릴(공가共架라고 한다) 수 없을 때 각자가 전주를 설치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KT에서 설치하는 통신용 전주다. 통신용으로는 IP주로 불리는 철제 강관주(철제 파이프로 만든 전봇대)를 설치한다. 기타 케이블방송사 등도 담당 지자체의 인허가를 받아 설치할 수 있다. 전주를 이용하려면 사용료를 내야하는데 몰래 슬쩍 걸쳐놓는 몰지각한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까치도 공짜로 사용한다).
전주의 길이는 보통 14, 16m인데, 그 무게는 14m의 경우 1.5톤, 16m의 경우 1.9톤에 달한다. 전선망 등 부착물을 달았을 때, 최대설계하중은 1톤, 평균적으로 700kgf의 하중으로 설계한다. 규정상 1/6 정도를 땅에 묻는다. 16m 전봇대의 경우 2.67m 정도를 땅을 파야 하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빠지면 나오기 힘든 깊이다. 이 구덩이에 장력을 받는 반대방향으로 '근가'라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묶어서 묻는다. 또 말단이나 장력이 많이 걸리는 전봇대에는 지선을 덧대기도 한다.
현재 전국에 약 880만 주 가량이 설치되어 있다. 이 전봇대가 위치한 토지의 지주에게 한전에서 소정의 토지 사용료(20년 사용 조건으로 15,000원 정도)를 지급한다. 도로 등에는 지자체 규정에 의거하여 점용 허가를 받고 점용료를 지급한다(개당 1년에 600원 정도). 전주 하나의 가격은 500만원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차로 들이박아 전봇대를 뿌러뜨리면 이걸 물어줘야 하는데, 아마도 차만 대파되고 전봇대는 멀쩡할 것이다. 그만큼 튼튼하게 만들었다.
보통 50m 간격으로 설치되기 때문에 거리 측정 용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마다 차이가 난다. 전선부하가 많은 상가 및 번화가의 경우 30m, 도시지역은 40m, 촌락지역은 50m, 야외지역은 70m 정도다. 조건이 허락하면 100m 간격으로도 설치할 수 있지만, 130m 이상의 간격은 전선 무게와 지탱해야 하는 장력 부담 때문에 권장되지 않는다.
전주번호찰
전봇대의 표면에는 전주(전봇대)번호찰이 붙어있다. 한전에서 효율적인 관리를 목적으로 전주명과 숫자 7자리 영문 1자리로 구성된 전주번호를 부여한다. 한전의 신배전정보시스템(NDIS)에 구축된 배전설비의 좌표위치 및 배전 DB자료가 소방방재청의 긴급 구조활동에 제공되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 다급한 상황에 주소가 생각나지 않거나 마땅한 건물을 알려주기 어려울 때 112나 119에 알려주면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 참고로 이 번호로 한전 사이버지점 홈페이지에서 해당 전주의 선로용량도 알 수 있다.
전산화번호 중 맨앞자리 4숫자는 x, y축에 해당하는 좌표인데, 전국을 2km격자로 10,000등분하여 100 X 100으로 나눈 곳의 위치이다. 00~99까지 각각 부여한다. 영문자는 2km격자를 500 x 500 m 격자로 16등분하여 A~Z까지 부여한다. 아랫줄 6~7자리는 500 m 격자를 50 x 50 m 격자로 100등분하여 x, y축에 0~9까지 부여한다. 마지막 7번째 숫자는 50 m 격자내에 세워진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부여한다.
선로명은 대부분 동 또는 지명을 부여하나 기준이 따로 없어 임의로 부친다. 본선로에는 '본', 분기선에는 '지'라고 쓴다. 지중은 지중선을 의미한다. 선로번호는 기준점에서부터 멀어지는 것을 체계적으로 나타낸다. 예에서 M2는 기본에서 2번째 라인의 오른쪽 2번째(L2) 전신주라는 뜻이다. 보통 숫자만으로 되어 있다. 전신주가 계속 설치되어가면 번호가 더 붙는데 선로방향 좌우는 L,R로 , 좌측하A, 우측하B, 좌측상C, 우측상 D를 붙인다.
전봇대 최애 이용객, 까치
전봇대는 인간이 설치하지만 유달리 까치가 좋아한다. 까치는 뱀을 피해 높은 곳에 둥지를 만드는데, 쓸만한 나무가 없는 경우, 전봇대에 둥지를 만든다. 보통 10월에 만들고 이듬해 2~3월에 알을 낳는다. 문제는 둥지의 재료인 나무나 철사 또는 까치 자체가 도체가 되면서 누전사고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탈원전 정책으로 타격을 입고 있는 한전은 하늘의 벌을 받는지 까치들의 누전사고로 몸살을 앓고 있다. 변압기에 누전 사고라도 나면 폭주하는 민원 대처과 피해보상까지 해주어야 한다. 2020~2022년 조류에 의한 피해는 4048건, 170억원이라고 알려졌다. 이중 까치는 건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피해액은 77%를 차지한다. 까치가사고를 치면 피해가 크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일히 올라가서 쫓아내기도 어려워 한전은 전문 엽사를 고용해 마리 당 6000원을 주고 잡는다. 잘 잡은 사람은 2달에 1400만원 이상도 번다고 알려졌다. 한전은 2008~2017년 동안 총 88억원의 조류 포획 위탁포상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전봇대에 까치집이 있으면 엽사가 주변에 있는지 찾아보자. 전보가 없어져도 전봇대는 남아 있고 까치도 여전히 전봇대에 둥지를 지을 것으로 보인다.
전봇대에는 잃어버린 개를 찾는 안내문, 파출부도 찾고 사람도 찾고 온갖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한때는 그것을 떼어내는게 취로사업이기도 했다. 먹을 것도 없고 놀거리도 없던 시절에는 동네마다 있던 전봇대는 아이들의 주된 놀이기구이기도 했다. 전봇대에 고무줄을 걸고 고무줄 놀이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다방구같은 술래잡기의 기지로 이용되었다. 이제는 도시에 전봇대도 없고 노는 아이들도 없다. 동네 강아지와 술꾼들의 화장실 역할도 크게 했다.
2023년 8월 부산시는 전봇대에 전기자동차 충전기를 달아 충전소로 사용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전주는 어디나 많지만 전기차 충전소는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기 어려워 전주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다. 특히 주택으로 이루어진 구도심에는 주차장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도심의 주차공간이 부족한데 충전기를 설치하면 일반 휘발류차들의 주차면적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에 문제점은 있다. 이런 문제점만 해결하면 전봇대는 길가에 있고 전기도 바로 연결하면 되기 때문에 앞으로 많이 설치될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첫사랑의 추억은 오래남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 중에 흔적이 오래 남는 것이 있다. 전봇대가 그런 경우다. 나중에 전봇대가 왜 전봇대였는지 묻는다면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을까? 먼 훗날 우리 후손이나 외계인이 전봇대를 발굴하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아리송해하지 않을지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