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국도 지질 여행기
국립경주박물관은 양지바른 넓은 곳에 세워져 있어 이른 봄에 꽃이 잘 핀다. 경주 시내 4월의 벚꽃도 유명하고 5월의 이팝나무 꽃도 좋지만 나는 경주박물관 매화가 좋다. 3월이 안되었지만 사람들이 안 가는 편의점 앞 정원에는 붉고 하얀 매화가 가득하다.
박물관이야 한번 가면 다시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직 멀었다. 갈 때마다 다른 게 보이고 그 다름이 매력적이다. 호기심이 공부로, 공부가 볼 줄 아는 눈으로 옮겨가면 갈 때마다 다른 유물과 역사가 보인다. 물론 전시물이 바뀌면 더욱 그렇다. 아래의 특이한 불상은 2024년 2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미술관에 전시된 불상이다(위 사진은 오른쪽). 설명문을 요약해 보면,
무른 석재로 만들어졌고, 생김새도 특이하고 육감적 몸과 이국적 옷주름이 인도 굽타 양식의 영향을 받은 당나라 풍인 듯하다고 한다. 8세기 통일 신라의 것이며 경주읍성에서 발견됐다.
지질학을 안다면 경주하면 신라가 아니고 화강암, 화강암하면 불국사 화강암이 떠올라야 한다. 우리나라의 화강암은 지질학적으로 크게 대보화강암과 불국사화강암으로 나뉜다. 둘 다 중생대 시절에 만들어진 화강암이다. 불국사 근처에서 비정되어 경주 근처의 화강암을 불국사 화강암이라고 한다. 경주 토함산, 남산이 불국사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산이다. 이렇다 보니 신라의 석불, 석탑은 대부분 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오히려 화강암으로 만들지 않은 석조문화재가 드물어, 글 쓰는 이에게는 관심이 생긴다. 분황사의 안산암 모전탑도 그렇고, 역시 안산암인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호)이 그렇다. 안산암질 응회암인 골굴암의 타포니가 그렇고 현무암인 양남 주상절리군도 눈길을 끈다.
석조문화재에서 무른돌이라 하면 보통 대리석, 사암이나 응회암을 주로 지칭한다. 이 석조불입상은 필자가 보기에는 응회암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암석의 입자가 눈으로 식별되지 않을 정도로 세립질이다. 이런 종류의 암석은 지표면에 분출되어 빨리 식어서 결정이 성장할 시간이 없는 암석에서 주로 나타난다. 석불에 새겨진 무늬의 풍화정도를 보면 역시 강도 측면에서 약한 암석임을 알 수 있다.
지질학에서 암석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전문가의 시각에서도 만져보고 쳐다보는 것으로 구별될 정도로 전형적인 암석이 아닐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앞에서 응회암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갔지만 분출하는 마그마의 종류에 따라 각각 현무암, 안산암, 유문암으로 나뉜다. 색상으로 구별을 하기도 하지만 중간 성분의 것은 색으로 구별이 힘들고 풍화된 단면만으로도 구별하기는 어렵다. 암편을 갈아서 암석현미경으로 판단하는 게 보다 정확한데, 이런 유물을 파괴하는 조사법은 문화재에서는 힘들다.
경주박물관에는 이 석불에 대한 자료가 없다. 해설사도 설명판에 적혀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뿐이다. 큐레이터가 이 석불을 한정된 전시공간에 전시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인데 재료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양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찾기 어렵다. 불친절한 전시와 설명이 호기심을 유발할 목적이라면 성공한 듯하다.
신라미술관 귀퉁이에는 매우 커다란 석등이 복원되어 서 있다. 높이가 5.63m니 크기가 2층건물 높이는 된다. 역시 경주읍성(사적 96호, 1963.1.21 지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8~9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원래 하대석, 팔각기둥, 상대석 일부만 남은 것을 1975년 부재를 추가하여 복원했는데 남아 있는 신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남원실상사 석등처럼 불을 붙이는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다. 석등 앞 배례석은 석등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기증받은 물건이라고 한다. 경주읍성에는 무슨 건물이 있었길래 이런 유물들이 나왔을까?
현재 중부동에 위치한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읍성이다. 고려 현종 1012년에 토성으로 건축되어 조선시대에 석축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동쪽 편을 복원하였고 주민들이 살기 때문에 성벽을 차가 다닐 수 있게 뚫어서 만들어 놓았다.
신라 경순왕이 935년 왕건에게 항복하고 고려가 시작되면서 서라벌의 이름은 경주가 된다. 비록 고려 시대에는 서경, 평양과 함께 동경(東京)으로 대접했다고 하지만, 권력이 떠난 자리는 사람들도 떠나 황폐해지고 잡초만 자라났다. 고려 현종 3년(1012년)에 왕경이 있던 월성동에서 서북쪽으로 2km 떨어진 이곳에 읍성을 지어 관청 등 시설을 모았다.
경주는 유물이 넘쳐나는 동네이기 때문에 관광객들도 어디나 있는 조선시대 읍성을 보러 가지 않는다. 그런 게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도 든다. 어차피 고증할 자료도 없는 고려의 성곽을 만들거나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되살려 복원하는 게 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특이한 유물이 나오는 장소이니 만큼 그 방면으로 복원을 조화롭게 진행하는 것이 경주를 위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1. 경주 서악동 삼존불 입상의 기계적 훼손과 보존과학적 접근, 이찬희, 최석원, 한경순, 원경식, 대한지질학회지, 2001, 제37권, 제4호, p. 611-627
2. 경북 지질 대탐사 대장정, 7. 경주의 지질, 경북일보, 2018.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