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과학이야기
지진이나 화산은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예측가능하다.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살고 있어 두 가지 자연재해를 직접 경험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 위험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런 곳에서 산다. 자연재해는 2차 재해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곳은 더욱 위험하다. 대표적인 곳이 일본의 수도 도쿄이다.
도쿄지방을 중심으로 한 간토 지역의 지진은 그 사례를 다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가장 최근에 일어난 큰 지진인데 결코 마지막 지진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지진은 화재 같은 2차 피해를 주게 되는데, 불 때문이 아니라 불을 끄는 물의 공급이 끊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은 특유의 목재가옥 때문에 인구밀집 지역에 불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지진 때문이 아니더라도 인구밀접 지역인 에도(현재 도쿄)에는 화재가 빈번해 예부터 화재를 '에도의 꽃'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1657년 3월 2~4일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는 당시 에도 면적의 70%가 타버리고 사망자만 11만 명(당시 인구 70만 명 추정)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가 생겼다. 일본에서는 로마 대화재(64년), 런던 대화재(1666년)와 함께 세계 3대 대화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에도에 있는 혼묘지(本妙寺)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소녀(매년 한 명씩 3명이란 이야기도 있음)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운 후리소데(기모노의 일종)가 불이 붙은 채 본당으로 날아가 불이 붙으면서 도쿄 시가로 확산됐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때 에도성(현재의 황궁)의 혼마루(本丸, 천수각)도 소실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쇼군의 통치가 확고해서 천수각을 복원하지 않고 그 재원을 시가지 복구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성에 다 있는 혼마루가 현재 도쿄에는 없다.
이 화재로 인구가 밀집되어 화재에 취약했던 상인과 장인의 거주지역을 외곽으로 이전 확대하고 신사와 사원을 도시 외곽으로 이전시켰으며, 혼조와 에도 사이 스미다(隅田川) 강에 다리를 추가로 건설하여 에도는 현재의 고토구(江東區)와 스미다(墨田區)로 권역을 넓히게 됐다. 또 소방시설을 추가하고 소방조직인 정화소를 설립하여 전문 방재조직을 만들었고 시내 곳곳에 화재 감시 망루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료코쿠, 나카하시, 우에노, 스지카이바시몬 같은 교량의 가장자리와 교차로에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 노폭이 100m에 이르는 히로코지(廣小路)를 설치했는데, 이 지역은 차후에 번화가가 된다.
관동대지진(関東大地震, The Great Kanto Earthquake)은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다이쇼 12년) 11시 58분에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남관동지방)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규모 7.9의 해구형 지진이다. 진동이 본진이 시작될 때부터 완전히 멈출 때까지 4분~10분까지 걸린 오래 지속된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및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간토 대학살 등을 통틀어 간토대진재(関東大震災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라고 부른다. 점심시간 직전에 일어나 식사준비 중이던 주방의 화기에 의한 화재피해가 컸다. 일본 정부 공식 기록으로는 총 105,385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또 이때 벌어진 대학살로 약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관동대지진은 전년도 국민총생산의 1/3에 달할 정도로 큰 물적피해뿐만 아니라 인적 피해도 컸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잘 타는 목조 주택에 점심시간이 겹쳤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화재선풍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진 이틀 후에도 도쿄의 기온은 46도까지 올랐다고 한다.
정확한 전체 피해자는 모르지만 대략 10만 5천 명이 사망했고, 그중 3만 8천 명이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곳이 구 육군군복창이었다. 구(舊)라고 쓰는 이유는 발생 당시 이미 군복창은 이전하고 이름 붙일만한 시설이 없던 빈 공터였기 때문이다. 스미다강을 넘은 화재는 가재도구와 이불들을 짊어지고 온 피난민들을 습격했고, 숨을 곳 없었던 그들은 고스란히 불에 타 죽었다. 당시 시미다강의 시신이 너무 많아 시신만 밟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관동대지진은 복구과정도 혼란스러웠는데, 지진 일주일 전에 카토 도모사부로 총리는 암으로 죽고, 내각총리대신은 공석이었고 외무대신이 총리 권한대행이었기 때문이다. 권한대행이 처리할만한 규모의 일이 아니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말기, 최후까지 저항하는 일본을 항복시켜 피아간의 인명피해를 줄이고자 미군은 동경에 공습을 진행한다. 일본인들은 비로소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 1944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일본 전역에 수십 차례의 폭격이 이루어진다. 그중 1945년 3월 9일 밤 ~ 10일 새벽, 미공군 B-29 344대가 투입되어 진행된 공습의 피해가 가장 컸다. 가옥 26만 7천 채가 파괴되고 10만 명의 사망자, 10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미 제공권을 상실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부질없는 공습경보만 발령할 뿐 주민을 위한 변변찮은 반격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최신예 B-29는 3만 피트 이상으로 비행하여 일본 제로 전투기로는 요격이 불가능했다. 태평양 전투에서 미군이 섬들을 탈환함에 따라 일본 본토 공격이 가능한 거리에 비행장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초창기 미군은 고폭탄을 주로 사용하고 고공에서 조준기를 이용하여 폭탄을 투하하였으나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게다기 도쿄 상공에는 강력한 제트기류가 불어 폭탄을 조준하기가 어려웠다. 일본 방공망이 독일과는 달리 부실하다는 점을 알아챈 미군의 폭탄을 소이탄으로 바꾸고 3,000m 내외의 저공에서 비행대의 항로를 목표지점에서 x자로 겹치게 폭격을 진행했다.
당시 도쿄에는 인력으로만 구성된 의용소방대 외에는 변변한 장비와 조직은 없었다. 당초 미군은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하였지만, 군수산업과 소규모 가내수공업 공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당시 일본의 군수산업체계 때문에 결국 전 지역에 폭격을 감행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2023)에도 나오는 미 공습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이때도 관동대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화재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는데, 많은 부분이 화재선풍에 따른 피해였다. 다행이라면 도쿄가 모두 다 타버려서 원자폭탄의 목표지점에서 빠지게됐다는 정도였다.
순식간에 불기둥이 수십에서 수백 미터까지 치솟는 것을 화재선풍이라고 한다. 화염 토네이도 또는 악마의 불(Fire Devil), 화재선풍(火災旋風)이라고도 불린다. 화산 폭발이나 산불 등으로 인한 상승기류가 주변의 화염을 빨아올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2003년 호주 캔버라 산불에서 처음 관측됐고, 이후 2019-2020 호주 산불 및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불 등 대규모 산불에서 관찰되었다. 당연히 예전부터 있었지만 영상으로 잡히기는 처음이라는 이야기다.
지표면의 공기가 빠르게 상공으로 빨아올려지게 되므로 화재는 더욱 심해지고, 열기, 불뿐만 아니라 공기 중의 산소의 결핍에 의해서도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불기둥이 주변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작은 강 정도는 쉽게 건너뛸 수 있다. 우리나라 고성 산불이 낙산사에 옮겨 붙은 사례 등 대규모 산불에서 쉽게 관찰된다.
대응방법은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일반적인 토네이토의 경우는 진행방향의 90도 되는 방향으로 도망가는 것이 정석인데, 화재선풍은 이동 형태가 상대적으로 빠르고 무작위적이어서 이마저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1923년 관동대지진이나 1945년 도쿄대공습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 중 많은 비율이 화재 선풍의 직간접 희생자로 생각된다. 도쿄 도는 이 두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위패를 한 장소에 모아놓고 매년 위령제를 열고 있다. 스미다강 건너 스미다구에 요코 미쵸 공원이라는 작은 공원이 있다.
도쿄 스미다가 동쪽 스미다구 요코 미쵸 공원(横網町公園)에 도쿄도 부흥기념관(간토대지진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한적한 주택가에 마련된 공원에서는 스카이트리가 손에 잡힐 듯 보이고, 주변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이 총총걸음으로 질러가는 곳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이 자리는 육군의 피복창이 있다가 이전된 자리로 공터였다. 지진으로 이한 화재를 피하기 위해 4만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스미다 강을 건너온 불길은 피난민이 가지고 온 가재도구 등에 옮겨 붙어 화재선풍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3만 8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 1930년 이 자리에 위령탑을 건설했다. 이후 동경대공습의 희생자를 추가하여 1948년 납골당(Tokyo Memorial Hall)을 조성하였다. 이 납골당에 한국인 희생자도 모셔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공원의 한쪽 구석에는 도쿄도 부흥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1층에는 관동대지진 관련 유물과 사진자료를 전시하고, 2층에는 도쿄대공습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옛 건물이다. 입장료는 없고 면적이 크지 않아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지만, 다 보고 나면 아주 무거운 추가 누르는 듯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장소이다. 한국어 자료도 있고 친절한 할머니 자원봉사자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사물을 볼 때,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식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멋진 건물과 맛집도 도쿄의 모습이지만, 과거의 잊을 수 없는 모습들도 도쿄의 모습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재해가 우리에게 그리고 인류에게 앞으로 절대 없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다. 아마도 빠르거나 늦거나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도 이해하고 우리는 경험할 수 없는 재해의 모습과 이를 극복하는 인류의 자세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