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지진(関東大地震, The Great Kanto Earthquake) 또는 한국에서는 관동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다이쇼 12년) 11시 58분에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남관동지방)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규모 7.9의 해구형 지진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다이이치 소소 빌딩 옥상에서 본 니혼바시와 탄다 지역의 피해 모습,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진동이 본진이 시작될 때부터 완전히 멈출 때까지 4분~10분까지 걸린 오래 지속된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및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간토 대학살 등을 통틀어 간토대진재(関東大震災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라고 부른다.
점심시간 직전에 일어나 식사준비 중이던 주방의 화기에 의한 화재피해가 컸다. 일본 정부 공식 기록으로는 총 105,385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또 이때 벌어진 대학살로 약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Marunouchi after the Great Kanto Earthquake, source: wikimedia commons by public domain
1703년(겐로쿠 16년)에 일어난 지진도 간토 대지진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1923년 지진을 '다이쇼 간토 지진(大正関東地震)'으로 부르고, 1703년 간토 지진을 '겐로쿠 간토 지진(元禄関東地震)'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두 지진은 사가미 해곡의 판 경계를 따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두 지진을 한데 묶어 사가미 해곡 거대지진으로 부르며, 간단하게 사가미 해곡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총칭하여 간토 지진으로 묶어 부르기도 한다.
지진 예측 논쟁
메이지 정부에서는 서구에서 각종 분야의 과학자를 초빙했다. 하지만 여기에 지진 관련 학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서양에서도 지진학이 초창기 단계였고 연구분야도 주로 지구 내부 구조에 맞춰져 있어, 일상의 예측을 해야 하는 지진 피해 강국 일본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진학은 일본이 잠시나마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1880년 세계 최초의 지진학회가 일본에서 창립되었고 1886년 도쿄 제국대학에 세계 최초로 지진학 강좌가 개설됐다.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1905년, 도쿄제국대학 교수들인 오모리 후사키치(大森房吉, 1868년~1923년)와 이마무라 아키쓰네(今村明恒, 1870년~1948년)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오모리는 당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진학자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는 세계 최고의 지진학자로 신문에 소개되었다. 반면 나이 차이가 거의 안 나지만 이마무라는 조교수였다.
오모리 후사키치와 마무라 아키쓰네, sourc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마무라 교수는 잡지 <태양>에 도쿄 남쪽의 사가미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사설을 통해 도쿄 전역은 대지진과 화재로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날 수도 있어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마무라의 예측은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잡지 기고가 신문에 선정적으로 보도되어 시민들에게 혼란을 주었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은 믿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여러 번 지진 예측에 성공한 세계적인 지진학자였던 오모리 교수는 이 예측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오모리 교수는 해당 지역의 정기적인 소규모의 지진 발생은 단층의 지진응력을 해소하여 지진의 위험성을 줄인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간토 대지진 발생 직전까지도, 도쿄에서 1921년 말(M6.4-7.0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1922년 중반(M6.8 가나가와현 동부 지진), 1923년 초(M6 이바라키현 해역 지진)에 주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거로 하여 도쿄 지역의 대지진 위험성이 해소되었음을 반박했다.
1915년에도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논쟁을 했고, 불리해진 이마무라는 교수직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고 오모리는 꾸준히 세계의 지진을 예측해 내는 신기를 보였다.
관동대지진 발생 시의 지진계 기록, source: wikimedia commons
하지만 1923년 9월 1일에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입장이 뒤바뀌게 되었다. 당시 시드니의 학회에 참석하고 있던 오모리는 호주학자들에게 지진계를 보여주던 순간 지진계가 움직이며 도쿄의 지진을 알게 됐다. 보고에 사망자만 수만 명이라고 전해졌으나 오모리는 과장된 것일 거라고도 이야기했다. 반면 이마무라는 당시 도쿄 제국대학 지진연구소에 있었으며 초기 진동을 지진계에 기록할 수 있었다. 오모리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마무라는 정부의 핵심 과학 자문이자 지진을 예측한 당사자로서 전 세계 언론을 상대했다. 폐허가 된 요코하마로 귀국한 오모리는 이마무라에게 사과했고 2달 뒤 지병인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이후 추정되는 지진의 원인
1971년 가나모리 히로오(金森博雄, 1936~)등이 발표한 지진 메커니즘에 따르면 간토 대지진은 미우라반도 연장선 방향의 사가미 해곡의 주축에 평행한 우향으로 어긋난 낮은 섭입 각도의 역단층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추정된다. 1996년 다케무라 마사유키(武村雅之, 1952~)도 P파의 초동분포를 통해 진원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가나모리가 말한 대로 단층면은 필리핀해판의 섭입 방향으로 추정되는 북동동 방향으로 34도 정도 경사진 경사면으로 추정되며 옆으로 어긋난 성분이 많다고 추정하였으나, 관측 데이터가 충분치 않고 다른 가설들도 많아 이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일본 지진조사위원회는 필리핀해판이 침강하는 판 경계 간 지역에서 북아메리카 판이 끌려 내려가다 반대로 튕겨 올라가면서 일어난 지진으로 보고 있다. 반면 일부학자들은 필리핀해판의 혼슈 쪽 판 사이 경계 지점은 지질학적으로 진원 부근에 있으며,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스루가 해곡에서 일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도카이 지진을 볼 때 간토 대지진은 판 내부에서 일어난 지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23 관동대지진시의 진도, X표가 진앙 위치. source: wikimedia commons by As6022014
단층선 위에 세운 나라, 재해공동체 일본
지진은 다시 오는가
2023년 2월 발생한 투르키예 지진 시 한국 구조대의 모습, 출처:KBS
일본은 5개의 지질학적 판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나라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그 재해를 함께 겪으며 오늘날까지 살아온 재해공동체이다. 일본이 지진 예측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잦은 지진 때문이다. 서양에서 지진은 빈발하지 않고 지구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과학 도구였다. 하지만 일본에게 지진은 생존의 문제이다. 따라서 일본 지진학자에게 지진의 예측은 사회적인 소명일 수도 있었다. 과학자라면 누구도 하기 힘든 그리고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지진 예측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사는 것이 일본의 지진학자이다.
지진은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끼리 보듬고 위로하며 도와서 이겨갈 수 있을 뿐이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당시의 학살을 잊을 수 없다. 그 사람들은 바뀌었을까. 반드시 다시 발생할 지진에 성숙한 인간을 기대해 보는 건 과욕일 것인가. 야수와 광기의 시기를 다시 겪기 전에 깨닫길 바랄 뿐이다. 다시 오는 지진이 무서운 것보다 인간의 망각에 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참고문헌
1. 김범성, ‘지진 예보’의 꿈과 현실 - 일본의 지진 예측 연구에 관한 역사적 고찰, 일본비평 제7호, 2012.8.15, p.140~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