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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퀸 Mar 13. 2024

촌년

야호!

드디어 수능이 끝났다!

신난다!

얘들아, 우리 맛있는 거 먹고 노래방 가자!

그래~그래!


이제 인생에 있어서 더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자유인데 남자도 만나봐야 한다는 친구의 강력한 주장과 오지랖 넓은 그 친구 주선으로 우리 사총사는 나름 엄선된 4명의 남자애들과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 연예인같이 잘 생긴 남자애는 없었지만 그중 한 명이 내 맘에 꼭 들었다. 귀여우면서도 웃을 땐 섹시한 면이 살짝살짝 보여 그 애가 웃을 때마다 내 심장이 자꾸만 그 아이 쪽으로 튀어 나가려고 했다.


맛있는 것을 함께 먹으며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남자애 4명과 우리 4명은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따뜻한 식당에서 나오니 찬바람이 무방비 상태인 내 얼굴을 때렸다. 피부가 따가웠다. 빨리 다시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어 친구 팔짱을 끼며 재촉했다.

"우리 빨리 노래방 가자. 추워 죽겠어."

"오케이 오케이, 죽여주는 데로 이 언니가 다 알아놨다. 얼마 안 멀어. 이 근처니까 언니만 믿고 따라온나."


적지 않은 인원이 한꺼번에 좁은 인도를 걸으려니 속도가 잘 안 나고 가깝다던 '죽여주는 노래방'은 가깝지 않았다. 한 30분은 족히 걸은 것 같았다. 칼바람에 얼굴이 베인 것 같이 화끈거렸다.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해?"

딴 애들은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노래방이 멀던 가깝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난 거리가 신경 쓰였다. 겨울바람이 괴로웠다.


"다 왔다! 바로 여기야! 어때 으리삐까뻔쩍! 간지나지?"

블링블링 네온사인이 내 친구의 빼어난 안목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를 핑크빛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다들 흥분해서 반짝반짝 데코레이션으로 뒤덮인 벽을 사이에 두고 계단을 우르르 내려갔다.

통유리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우리 몸을 감쌌고 흘러나오는 들뜬 노랫소리는 예민한 우리 십 대들 세포를 마구 흔들어놨다.


"어서 오세요!"

주인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아줌마였는데 한껏 꾸미고 눈웃음을 흘리는 폼이 깐깐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내 친구는 노래방을 매번 들락날락하더니 역시 훌륭한 장소를 물색해 놓은 것이었다.

주인아줌마는 몰려오는 손님이 돈으로 보였는지 한 명 한 명을 세종대왕이 그려진 배춧잎으로 보는 듯 입이 점점 찢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의 집요한 눈길에 내 고개는 목뼈가 고무로 변한 것처럼 점점 숙여졌다.


"어이, 거기 학생!"

"네? 저요?"

"응, 학생. 미안하지만 우리는 술 취한 학생은 안 받아요. 요즘에 단속이 심해서 걸리면 큰일 나. 내가 미성년자에게 술 팔았다고 오해받는다고."

"네? 저 술 안 마셨는데요?"

"에휴~ 학생. 속일 걸 속여. 얼굴이 벌겋게 된 것이 꽤 마신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술 취했으면 얼른 집으로 들어가요. 나도 학생 같은 딸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술 취한 채로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딱 봐도 많이 취했구먼, 뭐."


아, 까먹고 있었다. 수능 끝났다는 해방감에,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흥분에, 맘에 드는 남자애도 있다는 설렘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오지랖 넓은 그 친구가 또 오지랖을 떤다.

"하하! 얘는요. 촌년병이 있어서 볼이 빨개지는 거예요."

"촌년병?" 아줌마는 이제 내 얼굴을 무슨 환자 얼굴 보듯이 쳐다봤다. 촌년병 걸린 환자. 이내 아줌마는 무엇인가 이해했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아, 안면홍조로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오지랖 친구의 '촌년병'이란 말에 난 금세 '촌년'이 되고 말았다.

잠시 흐르던 정적을 뚫고 한 남자애가 '촌년병'을 조그맣게 말해보더니 키득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들 못 참겠다는 듯이 '촌년병'을 외치며 웃어젖힌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오늘 처음 만난 남자애들도 배를 잡고 몸이 접힐 정도로 웃었다. 눈물까지 흘리는 그들을 보며 난 억울했다.


 촌년 아닌데...

서울 토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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