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년 만의 박준 시인 시집, 창비, 조용한 위로의 시집
다시, 박준 작가님의 시집이다. 2018년도,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께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시집을 사 주셨다. 그때, 집에서 시를 읽고 조용히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만난 시인, 박준 작가님. 그리고 다시 7년 만에 새로운 시집을 내셨다고 한다. 올해도 그 선생님께서 박준 시인의 시집을 사 주셨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책상에 편지와 함께 놓여있던 시집. 그때 문자가 왔다. 도서관 프로그램으로 박준 시인의 강연이 있다는 문자. 우연이었겠지만 필연처럼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이번 주말, 강연을 다녀왔다. 낮고 부드럽지만 유머러스한 시인의 목소리로 시를 듣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고 시가 더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여전히 이번 시집도 참 좋다. 울음을 숨길 수 없게 만드는 시가 있다.
1. 공터
공터
다시 찾은 그곳이 초록으로 우거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그동안의 믿음이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우며 헐며 사는 일이 그나마 나을 것이라 생각했던 믿음 말입니다. 삶은 너의 너머에 있지 않았고 노래가 되지 못한 것만이 내 몸에 남아 있습니다. (전문, 34쪽)
언젠가 딸과 함께 동네를 거닐면서 공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넓은 공터를 본 적이 있다. 땅은 척박했고, 쩍쩍 갈라져 있었으며, 공사를 진행할 거라는 표지판은 붙어 있었지만, 공사가 시작될 기미는 없었다. 공터를 바라보며 딸이 말했다.
“나는 이런 땅이 많았으면 좋겠어. 집도 밭도 아닌, 그냥 공터. 그냥 아무런 것 없는 넓은 공터가 동네에 많았으면 좋겠어.”
“아니, 왜? 쓸모없잖아.”
“그래도 그냥 공터가 있는 게 좋아.”
그냥 지나가며 한 말인데, 시집에서 이 시를 읽고 그때 그 대화의 순간이 생각났다.
때때로 마음에 공허함이 생길 때가 있다. 그때의 공허함을 ‘공터’라고 표현한다면, 나는 내 마음의 공터를 그냥 보지 못했다. 늘 공터를 없애, 새로운 것을 지어내며 마음에 뭔가를 꽉 채우며 살아내야 열심히 산 것이고, 나의 생활을 증명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마음에 공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공터를 바라본 화자의 이야기이다. 다시 찾은 그곳이 초록으로 우거져 있는 것은 본 화자는 자신의 믿음이 깨졌음을 인지한다. 삶이 그런 것이다.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는 것. 너를 벗어나 존재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것,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삶은 너의 너머에 있지 않다고, 완성된 사랑의 노래가 아니어도 음표로, 소리로, 기억으로 노래가 되지 못한 것으로 그렇게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시인의 창작 의도는 모른다. 다만 이 시는 나에게 와 나를 찔렀다. 지우며 헐며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설령 이별이며, 실패며, 좌절이며, 포기라 할지라도 공터는 공터 그래도 마음에 두어도 괜찮다는 그런 생각. 마음 잔잔히 스며드는 위로이다.
내 마음의 공터도 그대로 두어야겠다.
2. 마름
마름
이제 이곳 해안에도/ 여름 물이 마르고/ 가을 찬물이 들어옵니다.
보잘것없는 상대에게/ 한번 옮겨 간 마음은
어지간해서 다시 거두어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고 갑니다.
살면서 나를 아껴준/ 몇몇 이들도 한 번쯤/이곳을 다녀간 모양입니다. (전문/13쪽)
참 따뜻한 시다. 마름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래도 따뜻하게 느꼈던 것은 살면서 나를 아껴준 몇몇 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름은 여름철 물가에 피는 한해살이 꽃이었다. 작고 보잘것없는 상대에게 마음이 갈 때가 있다. 정말 한번 옮겨 간 마음은 거둬들이기 힘들다. 사랑의 책임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나를 보아서인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 학교 산책을 할 때면, 노란 꽃잎을 잔뜩 오므리고 있는 작디작은 꽃들을 만날 때가 있다. 잔디에 잡초처럼 섞여 피는 꽃. 때때론 괭이밥이기도 하고, 클로버의 꽃이기도 한. 한낮에 학교를 산책하면 오므리고 있던 꽃잎이 한껏 벌어져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또 그대로 아름답다. 작고 연약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힘. 그게 무엇일까? 시 속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잘것없는 상대에게 한번 옮겨 간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봐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의 화자는 여름 한 철 물가에 핀 마름을 보았나 보다. 보잘것없어서 오히려 더 마음이 갔었나 보다. 그리고 계절은 가을을 향해 가고 마름을 서서히 지고 있다. 화자는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준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마름을 보았을 것이라고.
시를 읽고 나를 따뜻하게 봐준 참 많은 사람이 생각났다. 언제나 스스로 강인한 편이라 여겨 슬픔도, 아픔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이지만, 나의 연약함을 온전히 내보일 수 있는 안전한 사람들. 그들의 따뜻함이 나를 꽃피우게 한다.
3. 정리
학교 공강 시간에 책을 읽다 울컥 울음이 몰려왔다. 모든 시가 슬펐던 것은 아니지만, 낮고 부드러워 잔잔하게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고, 저 속에 숨겨두었던 슬픔이 차올랐다. 하지만 시를 다 읽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삶에서 작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며 사는 삶을 긍정하게 되는 시다. 좋다.
시인의 강연을 다 듣고, 책에 사인을 받았다. 시인께서는 시에 실린 한 구절을 적어주셨다.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 여름을 맞이하고 있는 나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책이 있어 참 고맙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 중 가장 인상 깊은 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왜 그 시가 마음에 들었을까요?
2) 살면서 나를 아껴준 몇몇 이들을 떠올려 봅시다. 어떤 분이었으며, 그분의 아껴줌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