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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Oct 14. 2022

안승용 1편

An Seungyong from South Korea

  올라코 덕분에 도착한 나의 첫 숙소, 시수르 알베르게에는 한국인이 세 명이나 있었다. 대학생 동생 두 명과 60대 남자 선생님 한 분. 나의 부족한 정보력을 실감한 하루였기 때문일까. 이제 나에게도 ‘일행’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장수가 된 느낌이었다.    

 

  통성명하고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빈 침대들이 이어서 도착하는 순례자들로 꽉 찼다. 침대를 받지 못한 순례자들은 주인에게 사정해서 홀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자는 눈치였다. 올라코가 아니었으면 내가 바닥 신세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대로 그냥 자면 안 될 것 같았다. 자고 나면 행여나 그 고마운 감정이 조금이라도 옅어질까 봐 피곤함에 감겨오는 눈을 부릅뜨고 일기를 썼다. 그러고는 저녁 식사도 거른 채 기절하고 말았다.      


  눈을 뜨니 컴컴한 새벽이었다. 아직 자는 순례자들을 배려해서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출발 준비를 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대뜸 신경질을 내셨다. 대충 몇 시 전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게 매너인 것도 모르냐는 식이었다. 깜짝 놀라 도망치듯 알베르게를 빠져나왔다.

      

  이등병처럼 얼이 빠진 채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바르(Bar)라는 곳에 처음 들렀다. 호된 신고식의 아픔도 잠시 나는 곧 이 바르의 매력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커피, 생맥주, 와인, 칵테일은 기본에 크루아상이나 또르티야처럼 아침 대용 먹을거리부터 각종 안주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순례자들은 추운 아침엔 이곳에서 따뜻한 카페콘레체(스페인식 카페라떼)로 몸을 데우고, 걷다가 더워지면 들어가 생맥주로 목을 축이며 잠시 쉬어가곤 했다. 특히 문 연 알베르게마저 드문드문 있는 황량한 겨울 순례길에서 바르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나는 순례길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등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하는 키다리 의자와 바닥에 잔뜩 버려져 있는 담배꽁초들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인생 첫 바르 탐방을 마치고 나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산티아고 길을 나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등산용 스틱까지 네 발이었다. 처음에는 차라리 그냥 걷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영 어색했다. 몸개그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 왼쪽 스틱과 왼발이 함께 나가기도 했다. 그럴 땐 흠칫하며 누가 봤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일행들은 나보다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그들은 스틱과 이미 한 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스틱만이 아니었다. 살면서 그렇게 무거운 배낭을 메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배낭을 메고 2~30km를 내리 걸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초반에는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 풍경에 감탄하며 걷느라 힘든 것도 몰랐다. 하지만 엉터리로 멘 배낭은 이내 나의 어깨와 골반을 빠질 것처럼 아프게 만들었다. 


  그 상태로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페르돈 고개를 넘었다.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해 짓눌린 마음을 내려놓는 곳이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내려놓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하나,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배낭뿐이었다.     

 

 게다가 초짜 순례자는 오늘 먹을 식량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등산화와 양말까지 모두 벗어 던진 채 축축한 땅에 철퍼덕 주저앉아 아침에 바르에서 가져온 작은 머핀으로 허기를 달랠 뿐이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바위에 앉아 세상 느긋한 모습으로 맥가이버 칼을 나이프 삼아 바게트에 버터를 발라 드시던 분이 있었으니…! 바로 나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적, 안승용 선생님이다.   

  

  알고 보니 이런 엄청난 여유와 포스는 이미 순례길도 한 번 경험하시고 남극 기지까지 다녀오신 여행 베테랑의 연륜에서 나온 것이었다. 퍽퍽한 머핀이 유일한 식량이던 그때 안 선생님이 건네주신 짭조름한 김 두 장이 어찌나 맛있던지!     


  후반에는 내가 스틱을 끄는 건지, 스틱이 나를 끄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진귀한 체험을 하며 겨우겨우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 도착했다. 쉴 겨를도 없이 나를 짓눌렀던 짐을 다 정리해서 어제 가지 못한 우체국부터 부랴부랴 찾아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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