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걷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 20길
길에서 본 많은 올레꾼들은 참 잘 걸었다. 나는 웬만큼 걷는다고 생각했다. 올레길의 나는 그들에 비해 걸음도 느렸고 조금만 걸어도 쉬어야 했다. 한 번은 워낙 잘 걷는 이들이 있어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가 보았다. 초반에는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앞서가는 이들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고 끝내 따라잡지 못했다. 무리하게 따라가다가 숨을 회복하기 위해 한 참을 쉬어야 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음번에는 더 잘 걸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인생에 다음은 없다.
20길을 걸었다. 그 길 이후에는 한 코스가 남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월정리 카페거리로 들어섰다. 해변 전망 좋은 곳에 귀여운 전구들이 매달린 예쁜 카페들을 애써 지나쳐 마을길로 들어섰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 비도 그을 겸 때마침 보이는 무인카페에 들어갔다. 걷다가 계획 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곳에서 쉴 정도로 길에 익숙해졌다. 올레 스물일곱 코스 중에 스무 개 정도를 걸을 즈음부터 걷는 것도 많이 수월해졌다. 무리하지 않고 나의 속도로 걷다 보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애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신발끈을 매고 길을 나서면 그 이후는 자연스럽게 되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탄 느낌이었다. 은퇴 후에 나의 길을 찾아 헤매는 중인 내게도 이처럼 편해지는 시간이 빨리 오기를 바랬다. 방법은 뻔하다. 가벼운 가방하나 짊어지고 길을 나서듯 그냥 시작하면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는 날도 올 것이다. 알기는 귀신같이 안다.
온갖 생각을 하며 아무도 오지 않는 카페에 한 참을 앉아있었다.
20길의 밭담 테마 공원을 지났다. 제주의 검은흙을 둘러싼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담인 밭담은 제주를 더 제주스럽게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내어 줌으로써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그 원리는 익히 들었다. 맞서지 않으면서도 막아내는 삶의 지혜가 새삼 느껴졌다. 길을 걷다가 밭담에 얹힌 돌 하나를 집어 보았다. 몇 개의 돌이 쉽게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이렇게 허술할 수가 있나…” 허술한 것들이 서로 힘을 모아 무지막지한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공원에 이런 표식이 있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허술하지만 버티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