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The trouble with not having a goal is that you can spend your life running up and down the field and never score.” (Bill Copeland)
나는 왜 임기가 없었을까?
글로비스로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업계에 계시던 분들을 만나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말을 들었다.
"윤대통령이 4년 반정도 있으면 정계를 은퇴하는데말야…“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말을 꺼냈는지 모르지만 속으로 너무 웃겼다.
'아니 정계에 들어온 게 언제라고 무슨 은퇴... 너무 웃기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계에서 수십 년을 활동했던 분들도 결국엔 대통령을 해보는 게 목표일 것이고
대통령을 하고 나면 은퇴수순이 맞으니, 그렇게 보면
정계에 오자마자 바로 대통령이 된 그분은 임기가 끝나면 은퇴를 하는 게 맞았다.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 안에 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든 생각.
'어 그런데 왜 나는 지금껏 내 임기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일국의 대통령을 해도 임기가 있는데 내가 뭐라고...'
생각의 끝에 떠오른 말은 '대기업.'
내가 어쩌다 보니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대기업에 근무하게 되면서,
그 안에서 운 좋게도 나름 인정받고 승진도 빨리 하게 되면서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하다 보면 나중에 뭔가 되어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기에
나는 임기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새로운 것이 주어질 때마다 긍정의 힘으로 다시 열심히 뛸 뿐
언제까지 무엇을 마무리하고, 어떤 모습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흘려 보낸 내 인생의 편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다.
이제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내 임기를 주지 않는다면 내가 스스로 임기를 만들어 보자.
남은 인생을 내 가상의 임기로 쪼개서 하나하나 차근히 성취해 봐야겠다.
글로비스에서의 내 임기는 얼마나 될까?
물론 신사업이라는 게 수년 사이에 결판이 바로바로 나는 게 아니라서
5년, 10년을 내다보고 차근히 준비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대기업에서 10년 넘게 신사업을 해보겠다고 뛰어다니면서 하나 배운 건
회사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
이유는 그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글로비스도 신사업 키워보자고 별도 본부까지 따로 만들면서 의지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코 예외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
그게 내가 생각한 내 가상의 임기였다.
글로비스에서 내가 기여할 게 있다면 그 안에 해야겠다 생각했다.
혹시 시간이 더 주어져 4년, 5년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3년 내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려면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보기 위해
우리 본부에서 하겠다고 하는 신사업 과제들을 빠짐없이 리스트업 해보았다.
70개가 넘는 아이템이 있었지만 하나하나가 턱 없이 깊이가 부족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사장님실에 올라갔다.
“어 박상무 왔나? 왜 무슨 일이고?”
“사장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어, 이야기해 봐."
"저희가 신사업한다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데 좀 욕심인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아이템을 아이디어 수준에서만 논의를 하다 보니
정작 성공시키기 위한 단계까지는 못 가는 것 같아요.
아이템 수를 줄이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 내 뭔 말인지 알겠다. 당신 말이 맞는데...
아직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데이. 내가 볼 때는 아직도 부족해.
사람이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판단을 할 수 있나?
조금 더 발산을 해서 아이디어를 더 모으고 검증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정말 살아남을 것들이 나타날거라고.
그때 선택을 해도 늦지 않아.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도 된데이.”
“아,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피드백 감사해요 사장님.”
사장님 생각이 저렇게 명백하다면 그건 Managerial Decision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내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 의사결정 하에서 뭔가를 되게 해야 했다.
자리에 돌아와서 난 기획팀 친구들을 불러 신사업 Funnel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왜 이게 필요한지와 어떻게 만드는지 방법을 알려주고 몇주를 끙끙대서 만들었다.
그 후 70여 개의 신사업 아이템을 그 Funnel 위에 찍어보고
3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나마 실체가 있어 보이는, Funnel의 맨 앞 단에 놓인 사업이 태국사업이었다.
태국사업은 내가 오기도 전에 이미 몇 년간 공을 들여 키워놓은 사업이라서
여전히 이렇게 진행이 안되고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 유럽, 호주 등 넓게 퍼져있던 글로벌 사업개발도
리소스를 분산시키지 않고 동남아에 집중하기로 했다.
태국사업 시작 후 제2의 태국이 될만한 동남아 국가를 살펴보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정도가 적합했다.
그렇게 목표를 좁혀 나갔다.
추가로 생각했던 것은 스마트물류솔루션사업이었다.
Funnel 상에서 아직 가시적인 진척은 없었으나
주력사업 인접영역에서 가장 힘을 받고 진행할만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룹이 로봇을 미래 포트폴리오의 20%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상황을 감안하면
물류회사인 글로비스가 물류자동화를 위한 로봇 사업화를 하는 게 명분도 된다고 생각했다.
큰 덩치의 신사업으로 수소사업과 EV배터리 재사용/재활용사업도 있었으나
큰 투자를 수반하여 10년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하는 사업으로 보았다.
멀리 보고 필요한 준비는 하겠지만, 시장, 기술, 규제 변화 등을 감안할 때
3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긴 어려운 사업이었다.
목표가 보다 분명해졌다.
3년 후 목표를 달성했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성공의 기준도 명확해졌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 임기 내에, 내가 목표로 세운 것들을, 목표한 수준만큼 진전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내가 내 임기 내에 글로비스에 기여하고
내가 소모한 3년이란 시간을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몇 가지에 집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확히 3년 후
나는 글로비스에서의 여정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그 순간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난 흔들렸을지 모른다.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시간이 빨리 다가온 것에 대해 원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 저녁 식사 이후
나 스스로 가상의 임기를 만들었던 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인생은 순간의 사소한 깨달음과 과감한 행동으로 바뀌어 간다는 걸 배웠다.
참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