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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 실체

by 뜰에바다

출근할 때마다 잠깐 전철역 지하통로를 지난다. 급히 지나는 길인데 근래에 20대로 보이는 젊은이가 구걸을 시작했다. '조금만 도와주세요.' 현금 없이 살므로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그를 지나치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문제는 '긍휼'이 아니다. '구걸하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쉬울 텐데....' 그러면서 탓한다. '왜 긍휼의 마음이 아니지?'


젊어서 한때는 일부러 잔돈을 가지고 다녔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에게는 푼돈이라도 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랜 세월 승용차를 이용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서너 번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악해진 것일까? 쓴맛과 단맛의 인생을 살다 보니 '긍휼'이 사라진 것일까? 왜 이리도 무정한가?

이유를 chat GPT에 물었다. 대답이 장황했다. 그런데 그의 5가지 대답에 나의 마음이 다 들어 있었다.


1. 능력이 있음에도 ‘노력하지 않는다’라는 인식 - 젊은이는 일반적으로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나이로 여겨지기 때문에,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 '왜 일하지 않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게으르다는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2. 자립 가능성에 대한 기대 - 사회는 젊은이에게 자립과 독립을 기대합니다. 이런 기대에 반하는 모습을 보면 실망이나 냉담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3. 사기일 수 있다는 불신 - 일부 사람들이 구걸을 위장하여 돈을 벌거나 조직적으로 활동한다는 보도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구걸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특히 젊은 사람이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걸까?'라는 의심이 더 쉽게 생깁니다.

4. 사회적 피로감 - 사회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다른 이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어떤 사람의 처지가 진짜 힘들더라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5. 편견과 낙인 - 구걸하는 젊은이는 흔히 마약, 범죄, 무책임함 등과 연관된 고정관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연민보다 거부감으로 이어집니다.


차제에 마더 테레사(구 유고슬라비아, 1910~1997)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요, 20세기 인류애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8세에 수녀가 되어 21세에 인도 콜카타(옛 캘커타)로 옮겨가, 상류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20여 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니는 길에는 병들고 버림받아 가난한 사람들이 즐비했다. 점점 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그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이에 1950년,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공식적으로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수녀회에 귀속된 우아한 사역이 아닌,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자신만의 활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임종자를 위한 집, 나환자를 위한 집, 어린이를 위한 집, 노인을 위한 집, 에이즈 환자를 위한 집 등으로 확장했다. 그렇게 30여 년간 버림받고 가난하며 사랑받지 못한 이들에게 무조건의 사랑을 베푼 그녀의 헌신이 세상에 알려졌다. 1979년 세상은 그녀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겼다.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87세에 심장병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18년간 똑같은 길 위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헌신했다.


20세기, 여성 차별이 있던 시대에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로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의 근간이 무엇이었을까? 어릴 적 어머니의 가르침과 신의 부르심 여러 가지 이유가 선행한다. 그중 가장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마 25:35~36)

"가난한 사람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분을 만지고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마더 테레사. 《단순한 길》 백영미 역. 사이, 2006)


그럼에도 인도 힌두이즘 한가운데에서 기독 신앙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은 때로 그녀 자신과 신앙을 초월해야 했다. 그것은 그녀가 영혼의 깊은 어둠과 맞닥뜨려야 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나는 영혼이 얼어붙은 밤을 걷고 있어요.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나는 혼자입니다."(마더 테레사. 《와서 나의 빛이 되어라》 허진 역. 오래된미래, 2008)

또한 그것은 크고 작은 현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고통이었다.

"내 미소는 마스크예요. 그 안에는 고통과 어둠이 있어요."(같은 책)

하지만 그것이 테레사의 사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기 영혼의 어둠을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과 온전히 연대하라는 신의 은총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버림받음을 택했습니다."(같은 책)

하여 더욱 신을 갈망하고, 신이 자신을 사용하기를 소원하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나는 빛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그분이 나를 사용하시길 원합니다."(같은 책)


큰 공동체를 이끌든, 개인으로 가정이나 직장을 조촐하게 섬기든, 사람의 평생은 헌신으로 점철된다.사람으로 평가받은 마더 테레사도, 동북아 대한민국 서쪽 작은 땅 위에서 존재감조차 없이 사는 저와 여러분도 인생은 똑같은 헌신으로 움직인다는 말이다. 그것은 산속에 들어가 사는 자연인이라고 해서 인생이 멈춰져 있거나 1년의 일수가 짧지 않은 것과 같다. 구태여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다른 것을 구분한다면, 인생의 목적과 가치 부여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러분 삶의 목적과 가치는 무엇인가?

아파도 일해야 하는가?

죽지 못해서 사는가?

내 헌신이 볼품없는가?

시간만 낭비하는가?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길 위에 있다. 여러분의 헌신은 단순히 여러분 한 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혹은 가족이, 이웃이 그리스도를 보는 활동이기도 하다.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면 좋겠다. 오늘부터라도 여러분의 일과 헌신이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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