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난 너를 기억해. 남편이 아팠던 것도 카스에서 봤고. 난 ○○○야. 기억나니?"
"그럼. 난 2반이었지만 넌 3반 반장이었잖아."
"우리가 3학년 때 같이 경시대회 나갔었던 것도 기억하니? 난 다 생각난다."
"나도 경시대회 나갔던 건 생각나지. 그때 선생님이 기념사진 찍어 주셨잖아. 흑백사진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걸."
"그래서 말인데, 한번 보자. 이번 20일 동창회 때 만날 수 있을까?"
"또 시간이 안 맞아. 토요일이면 가능할 텐데."
초등학교를 떠난 지 어언 50년이 다가온다. 동창들은 언제부터인가 1년에 한 차례씩 전국에서 모여든다고 들었다. 나는 시간이 안 맞았다. 꼭 가서 대그룹으로 만나야 할 동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엇 친구들은 다른 자리에서 만나고 있었다. 길에서 만나면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동창들을 50여 년 만에 그룹으로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주로 잘 풀리고 성공한 아이들이 목소리를 낼 것이다. 아니 이제 모두 연륜이 쌓였으니, 한날 편안하게 만나 회포 풀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나는 십 대에 기억할 만한 원기 왕성한 장면이 없다. 기억하고 싶은 일들도 없다. 오히려 졸업식에서 송사를 망친 일 등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온통 회색빛이다. 총천연색은 어디에도 없다. 무엇이 내 십 대를 슬픔과 어둠으로 뒤덮었을까?
늦깎이로 상담을 전공하고 상담 실제를 경험하면서 내 먹구름의 근원을 알았다. 감정의 블랙홀이었다. 일곱 살에 내 곁을 떠난 아버지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그것이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여 나의 십 대의 생기를 빼앗았다. 결혼 후,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여러 차례 입원 치료받을 때, 그것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 달 후, 남편이 다시 흉통을 느끼고 입원하여 정밀검사를 받을 때였다. 겨우 대학병원 응급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숨을 돌렸는데, 불현듯 내 안에서 불같은 분노가 올라왔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응급실을 빠져나와 한쪽 복도 끝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분노를 삭였다. 약 30분 동안 격한 울음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흑흑"
그럼에도 그 즉시는 분노의 의미도, 근원도 오리무중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 옆에서 분노라니. 마땅히 그를 돌보며 의지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해석할 수 있었다. 어린 날에 아버지의 부재가 만든 블랙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의식해 본 적이 없지만 무의식에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믿었던 남편이 쓰러지자, 아버지를 잃어 안전한 지붕이 없는 일곱 살 아이의 분노가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이다.
일곱 살의 나는 아버지가 지병으로 별세했을 때, 한 번도 큰 소리로 울지 않았다고 한다. 막냇동생은 엄마를 따라서 세상이 떠나갈 듯이 울었어도 나는 입을 꼭 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침묵 기도와 집단상담실 안에서 일곱 살의 나는 울음을 넘어 절규하고 있었다.
"아빠! 가지 마세요! 아빠! 가지 마세요! 엄마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요! 아빠! 가지 마세요! 아빠! 죽지 마세요!"
말할 것도 없이 이후 나의 십 대 초등학교와 중학교 생활은 회색빛이었다. 한 번도 남을 공격하거나 고의로 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무의식 안에는 끊임없이 절규하고 분노하며 아버지 부재가 만든 블랙홀이 작용했다. 남편의 와병이 그것을 증명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블랙홀이 있을 것이다. 나와 엇비슷한 감정의 블랙홀은 오히려 사치일 수 있다. 인생의 중기나 후기에 만나는 블랙홀은 어린 날, 아버지의 부재로 생긴 감정의 블랙홀과는 그 크기와 정도가 다를 테니까.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실존 앞에서 존재 이유, 방향성, 가치, 신앙을 상실한 블랙홀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것이 공허함, 무력감, 혼란을 가져와, 마치 중력을 이겨낼 수 없는 블랙홀처럼 여러분을 고립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쓰라린 실패 앞에서 목 놓아 부를 이름이 없다면? 죽음의 밤을 지날 때 붙잡을 손이 없다면? 인생 후기임에도 아직 나의 몸과 마음을 기댈 언덕이 없다면?
소확행을 꿈꾸는 여러분이여, 감정이든 실제이든 나의 블랙홀을 알면 이미 그 블랙홀은 블랙홀이 아니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또 피할 수 있다. 미리 조처하여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지금 나의 길을 막는 블랙홀을 진단하라. 지금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을 좌우하는 블랙홀을 처단하라.
혹시 나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어둠과 사막이, 내 귓전에 음성이 닿기 전에 가로막고 있지는 않을까? 목자의 사랑 음성이 사막과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으로 내 귀에 닿게 하라.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