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풍 문어조림(蛸の江戸煮)
라일락을 비롯해 온갖 꽃향기가 마음을 아찔하게 만드는 계절이 왔다. 아파트 근처 놀이터에 있는 트위스트 머신에 올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허리 돌리기 운동을 하고 있노라면 향긋한 아가씨 분내처럼 꽃향기가 춤을 추며 돌아다닌다. 지난겨울은 참으로 외롭고 높고 쓸쓸했는데 그런 시간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게 해주는 봄날이다.
坐中花園 膽彼夭葉(좌중화원 담피요엽) _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兮兮美色 云何來矣(혜혜미색 운하래의) _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灼灼其花 何彼(艶)矣(작작기화 하피염의) _ 아름다운 꽃이여 그리도 농염한지
조선 전기 이조참판과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최한경의 한시 ‘花園(화원)’의 구절로, 시 ‘花園’은 그가 관직에 나아가기 전 성균관 유생 시절의 작품이다. 꽃을 빗대어 고백하는 연모의 감정이 아름답게 묻어 있는 시이다.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길을 걸어 도착한 코스트코에서 국내산 삶은 문어 한 마리를 사 왔다. 이제까지 문어는 늘 살짝 데쳐 초장에 찍어먹었다. 입에서 씹히는 문어 맛은 늘 일품이었다. 일본 스시 장인 35인이 161가지 술안주 만드는 법을 귀띰해주는《스시 마스터》에는 문어 벚꽃색 조림, 문어 간장 조림, 문어 에도풍 조림이 소개되어 있다.
문어 벚꽃색 조림은 문어조림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고 일본 스시집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간장, 설탕, 술을 기본으로 한 조림장에 조리는데 은은한 붉은색이 벚꽃색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어숙회와 달리 일본식 문어조림은 부드럽다. 문어조림이 부드러운 이유는 스시의 밥과 어울리기 위해서이다. 문어숙회처럼 쫄깃해서는 아무래도 스시로 먹기에 부담스러운 것이다.
《스시 마스터》에 소개된 문어조림 가운데 에도풍 문어조림을 한번 시도해 보았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팩트에 충실하자면 ‘에도풍 문어조림을 맛보았다’. 나는 요리는 못하면서 맛을 보는 감각은 약간 발달한 편인데 그것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그냥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요리를 못한다고 맛있는 것을 못 먹고 사느냐 하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늘 예상하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그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우리말로 ‘에도풍’으로 번역된 일본어는 ‘江戸煮’이다. 인터넷 일본 사전을 찾아보니 ‘江戸煮(에도풍)’은 ‘문어를 잘게 썰어 같은 양의 센차, 술과 함께 푹 끓인 후 간장, 유자식초 등을 넣어 부드럽게 조미한 요리’라고 설명이 나온다. 센차는 찻잎을 다린 것으로, 말차(가루로 된 차)가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애용된 것에 비해 센차는 에도시대 일본에 보급되었다.
에도는 도쿄의 옛 이름으로, 1868년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을 다스리던 도쿠가와막부가 있던 도시다. 18세기 인구가 100만을 넘는 대도시였던 에도에는 6천 개가 넘는 음식점이 있었고, 일본 요리는 에도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하니 ‘에도풍’이라는 말에는 분명 ‘맛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가쓰오부시를 넣어 조린 에도풍 문어조림은 부드러운 식감이 봄날의 벚꽃 잎을 닮아 있다.
벚꽃이 다 지고 2주 정도 지나자 겹벚꽃이 피었다. 벚꽃과 달리 여러 겹의 꽃잎이 달린 겹벚꽃은 지는 벚꽃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달래준다. 겹벚꽃마저 다 지면 진짜 눈이 부신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동네 술친구들과 모여 문어 벚꽃색 조림에 사케를 마시며 봄의 마음을 한번 더듬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