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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Mar 05. 2024

욕심 없는 그림

장욱진 그림산문집《강가의 아틀리에》

장욱진의 그림이 왜 좋은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림을 보았는데 좋았고 좋아서 자꾸만 보게 된다. 자꾸만 보아도 늘 좋다. 그의 그림에는 욕심이 없어서 좋다. 욕심이 없어서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림으로 말하는 화가에게 “문장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던 장욱진의 그림산문집《강가의 아틀리에》에는 화가로서의 일상과 그림에 대한 생각, 창작과정 등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의 글도 꾸밈없고 욕심이 없이 진솔하다. 공방, 작업실, 화실을 뜻하는 프랑스어 아틀리에(atelier)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되었지만, 장욱진의 글에서는 ‘아틀리에’라는 말이 어울린다. 70년대 출간된 이 책의 분위기를 잘 담고 있는 말이다.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하면 거기에는 나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평생 그림이 일이고 술이 휴식이었던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붓이 먼저가 아니라 생각이 먼저였고, 화폭을 어떻게 메우느냐가 아니라 무슨 생각을 채우느냐가 중요한 고민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화가는 “종종 무덤 같은 고독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학교 공부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학이나 법학이고 미술이나 음악은 천대받던 시절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장욱진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자 집안의 반대가 심하였고, 그를 맡아서 교육시켜 주던 고모는 매를 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탄압(?) 속에서도 그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뒤 계속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6·25 때 북한군 소속 미술동맹에 끌려가 유영국 화가와 함께 강제로 초상화를 그리던 일, 소학교 3학년 미술시간에 책에 있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상상하는 까치를 그려냈더니 ‘병(丙)’이란 낮은 점수를 받았다가 얼마 뒤 그가 일본 아동미술전에 뽑히자 이후에는 모든 그림 점수가 최고 점수 ‘갑상(甲上)’을 받은 일, 작품 ‘나무와 새’가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 전시되는 과정에 얽힌 일화 등등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는 일화 등이 풍성하다.     


덕소 화실과 문경새재 밑 수안보 탑동 화실을 거쳐 신갈 우리 화실에 이르는 세월 동안 장욱진에게 삶은 그림과 술이 전부였다. 화실에서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생활하면서 산책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그림 창작에 쓰고, 남는 시간에는 술을 마시면서 쉬었다.     


“그림처럼 정확한 내가 없다. 난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림처럼 정확한 놈이 없다. 내년 봄에 전시회를 약속했더니 그림을 통 못 그리겠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면 짐스러워지고 그게 꼭 그림에 나타난단 말이야.”    

 

그에게 그림은 일이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만나는 일이었다. 동네 새벽 산책길에서 만난 아동문학가 마해송과의 우정 어린 교류도 인상적이다. 마해송은 시인 마종기의 아버지이다. 산책길 인연으로 마해송의 책《앙그리께》표지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고, 마해송이 세상을 떠난 십 주기에는 장욱진이 그린 마해송의 인물 유화가 모 문학지에 실리기도 했다. 이 책에 들어간 삽화들은 그가 호구지책으로 그리던 것들과 지인들의 책 표지에 그려준 것들로 꾸며져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강가의 아틀리에》를 덮으니 추운 겨울 따뜻한 온돌방에 기분 좋게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책이 전해주는 깊고 은은한 온기가 전해졌다. 몇십 년 전에 쓰인 글이 책으로서의 ‘생명’을 잃지 않고 남아 오늘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맑고 깊은 삶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그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유명한 화가의 글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글에 삶의 본질을 마주하는 자의 진실한 독백이 담겨 있어서이다. 표지며 본문 종이며 그 모든 분위기가 요즘 책하고는 다른 그만의 멋스러움을 담고 있는 책이다.          



***     

   

붓에 뭔가를 이루었다는 욕심이 들어갈 때 그림은 사라지는 것이다.  

   

밤꽃 향기가 백 리를 가는 수안보에 비해 내 살림집이 잇는 서울 명륜동은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하지만, 나는 뭔가 크게 빼먹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라지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으로써 나는 생(生)을 사랑한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 곳에 세워 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림 그릴 때의 나는 이 우주 가운데 혼자 고립되어 서 있는 것이다. 번잡한 생활의 소음에 섞여 나도 함께 부유하다가 돌아오는 곳, 그것은 무섭도록 하얀 나의 캔버스 앞이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 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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