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턴, 캐나다
쿵짝이 잘 맞아 최근 친하게 지내고 있는 앞 집 사는 이웃을 집으로 초대했다. 점심으로 비빔밥과 김치전을 같이 먹은 이후로 자기도 점심 대접을 하겠다며 드릉드릉 신나 하더니 며칠 후 나름 심각하게 나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난 영국 사람이야. (뭐 새삼스럽게 정색하고 말하니 민망하군) 영국 음식 딱히 맛도 없고 멋도 없어. (남이 까는 건 분하지만 내가 까는 건 괜찮겠지?) 초대해 놓고 나니 뭘 대접해야 되나 고민이 돼."
나는 음식 해서 누구 밥 먹이는 거 좋아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고 같은 식으로 되갚을 필요 없다고 굳이 영국 전통 요리(?)를 선보이겠다고 부담 가질 필요 전혀 없다고, 평소 자주 먹는 거 아무거나 먹으면서 집안 여기저기 걸려 있던 본인 유화 작품이나 스케치해놓은 거 있으면 보여 달라고 방문의 목적을 분명히 했더니 안도하는 눈치다.
드디어 약속한 점심시간, 빈 손으로 가긴 민망해서 그 전날밤 자기 전에 만들어둔 바나나브레드 크게 세 조각을 잘라 가지고 그녀의 집 현관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맛있는 냄새가 집안을 가득 메운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거실이 아닌 식사하는 자리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라 소파 쪽 아닌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설렌다.
단정하게 차려진 테이블 위에 종이 냅킨 말고 근사한 식당에 온 듯 천으로 된 냅킨에 식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테이블 매트와 식기도 예쁘다. 직접 만든 듯한 투박하지만 채색이 잘 되어 있는 그녀의 이국적인 그릇도 괜히 더 멋스럽고 탐이 난다.
동유럽 쪽에서 많이 먹는다는 킬바사 소시지를 넣은 스플릿피 수프라는데 원래 이름은 잊어 먹었다고 한다. 레몬즙을 짜서 신맛을 추가하고 파슬리까지 올려놓으니 어디 요리책에서 볼 법한 비주얼이다. 이렇게 근사하게 차려놓고서는 이거 먹고 죽은 사람은 아직 없다면서 음식을 권한다. 이런 농담 너무 좋다. 대놓고 웃기는 건 아닌데 정색하고 쉰소리하는 영국식 유머는 맞장구치는 사람이 있어야 빛을 발한다.
부엌에 책장이 있다. (우후~내 스타일) 책장에 책도 있지만 흥미로운 잡동사니가 칸칸이 비집고 나온다. 부엌 상부장 위에 포스트잍이 잔뜩 붙어 있다. 정리를 잘 못 한다고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온갖 거 다 파는 선물가게나 골동품점처럼 나름 정돈된 혼돈(Organized Chaos)처럼 보이니 예술가의 정신이 스며있는 부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잔뜩 붙어 있는 포스트잍은 그녀가 아들 도시락에 매번 잊지 않고 시간 있을 때마다 대량생산 해 놓는다는 귀여운 그림과 재밌는 글귀로 도배되어 있다. 내가 관심을 보이니 신나서 이제껏 스크랩북에 모아둔 작품(?)들을 다 꺼내서 보여준다. 아들의 점심시간을 한 번씩 겪은 포스트잍은 너덜거린다. 젖었다 말라서 우글우글하다. 잉크가 퍼져서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다. 더 훼손되기 전에 스캔해서 디지털화하라고 부추겼다. 나중에 아들 성인이 되고 독립한다고 할 때 선물로 주라고, 많이 사랑받고 자랐다는 증거라고 생색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