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궁근종으로 적출수술을 하고 회복 중이라 이제 겨우 두어 번 정도 학교 운동장에서 마주쳐 안면을 튼 둘째 아이 다니는 학교 같은 학년 엄마와 우리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계속 누워 있고 가끔 병문안 오는 사람들과 몇 마디 나누는 것 외에는 얼굴 보고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많이 우울하고 외로웠다고 하기에 앞집 그녀와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병문안을 계획 했었으나 흐지부지 시간이 지나 이제는 병문안을 할 정도는 아닌 듯해 보여 만난 김에 후다닥 점심 약속을 잡은 것이다.
병원 관련 용어와 의학 용어 및 수술방법, 신체 내부 장기 등의 세부명과, 구체적 병명 등은 관련 전공자가 아니기에 사전이나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지 않으면 영어로 하는 대화를 제대로 다 이해하기는어렵다. 이런 대화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많이 들어 놓으려고 하는 편이다. 대화의 맥락을 잘 짚고 낄 수 있도록 미리 대화에 나올 법한 의학용어와 내부 장기들의 정확한 발음 등을 미리 사전에서 확인하고 공책에 적어 두었다.
앞집 그녀와 같이 만나서 12시까지 오라고 하고 비빔밥으로 할까 돼지고기 청경채 덮밥을 할까 메뉴를 고민하며 압력솥에 밥을 안치고 나니, 11시 넘어서 어제 무리했는지 오늘 약속을 취소해야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앞집 그녀가 문자를 주었다. 사실 일부러 부담 지우지 않으려고 내 전화번호를 알려 주는 대신 앞집 그녀를 중개인으로 두었다. 초대의 주체가 사라지자 좀 김이 샌 감은 있지만 희한하게도 굉장히 안도감이 들었다.
친구와의 약속이 틀어져서 외출이 갑자기 취소되었을 때, 화장하고 외출복 입은 것은 아깝지만 집에서 안 나가도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하는 모양새다.
빈손으로 와도 된다고 했는데도 굳이 영국산 디저트를 가지고 오겠다고 큰소리친 앞집 그녀와 둘이 서만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렇다면야 굳이 한식을 하겠다고 비빔밥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일이 수월하게 되었다. 내 비빔밥은 벌써 먹어본 그녀이기에 돼지고기 청경채 볶음으로 점심 준비를 한다.
포크찹용으로 뼈가 붙어 있는 돼지고기에서 살만 발라내어 썰고 미림, 마늘가루, 맛소금으로 밑간 해 둔 뒤에 감자 전분을 한 숟갈 넣어 뒤적거려 놓고 커다란 웍이 없는 고로 가진 냄비 중에 제일 큰 솥에다가 올리브유를 넉넉히 넣고 편으로 납작하게 썬 마늘 한 주먹을 넣은 후 마늘 기름을 내고 돼지고기를 넣어 볶아 다 익을 때쯤 굴소스를 넣고 익힌 후 청경채를 넣어 숨이 죽을 때 굴소스와 진간장을 한 숟갈 더 넣고 마무리 지은 후 참기름 살짝 검은깨 톡톡해서 갓 지은 밥 위에 올린다.
금방 한 밥은 제대로 된 반찬 없이도 맛있다. 본인이 한 밥은 찰기가 하나도 없고 푸슬푸슬한데 내가 한 밥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식감도 좋다고 칭찬이 자자한 그녀에게 혹시 쌀 어떤 거 쓰냐고 물어보니 예상대로 길쭉한 롱그레인이다. 한국에서 안남미라고도 부르는 재스민 라이스 등 롱그레인 쌀은 볶음밥이나 카레와 어울리지만 맨밥으로 먹을 때는 쫀득쫀득 찰기 가득한 한국산 쌀이 최고다.
쌀 종류와 압력솥의 마법에 대해 한참 떠벌떠벌 하며 의학용어와 어려운 단어의 압박감에서 행방되고 나니 수다가 너무 즐겁다. 역시 잘 모르는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는 힘들지만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익숙한 분야로는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도 않고 웃음이 흘러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