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끌림의 서 10화

끌림의 서 Chapter 1 피할 수 없는 외로움

사랑 참 부질없지만...

by 지영Robin
자신의 거미줄에 갇힌 커다란 거미의 일요일 아침


스트레스가 극으로 치달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나요?

나는 책을 읽습니다. 특히 소설을 읽으며 내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다른 세상으로 피신을 합니다. 어릴 때는 영화를 보며 피신을 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영화는 시각과 청각을 가득 메워버리니, 피신할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반면 소설은 문장을 따라가며 그 행간의 의미를 헤아리는 빈 공간이 주어지니, 내가 숨을 수 있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주어졌습니다.


특히 소설 속 주인공이나 그 주변 인물에 나를 대입해보면, 내 현실에서의 스트레스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니 나에겐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지'입니다. 나의 현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소설을 읽다가 그 비슷한 인물을 발견하면 답답하긴 하지만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할 수도 있게 되긴 합니다. (미움과는 별개로)


적막한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온갖 잡념으로 머릿속이 난장판일 때, 위로받고 싶지만 받을 수 없어 외로움이 사무칠 때, 내일 또 겪어 내야 할 삶의 무게로 짓눌리는 것 같을 때에도 "소설"은 더없이 좋은 치료제이기도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은 줄리언 반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문장과 글은 매끄러우면서도 디테일하다 못해 너무 친절해 보이는 문장 속에 치명적인 것을 감추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미켈란제로 카라바조의 회화 같습니다.

즉,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극단적으로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드라마틱한 그림의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플롯과 행간의 의미, 문장 사이사이 "-"으로 연결한 문장을 따라가려면 매우 높은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눈으로 그냥 글자만 읽다 보면 그냥 속시끄럽기만합니다.



"기억에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있고, 이것은 열등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하다."

- From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연애의 기억>은 열아홉 살, 이제 막 소년에서 벗어난 남자가 두 아이의 엄마이며 아내인,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중년(나이는 영 확 하지 않지만 대략 40대 전후)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도주하고 살았던 약 십여 년 간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글입니다.


그 남자의 시선으로 오로지 쓰인 글입니다. 그녀를 다른 이들에게 연인이라고 하지 못하고 그녀의 '조카', 혹은 '하숙인'이라고 하는 비겁함, 파격을 저지르면서도 외부의 시선과 평가에는 민감해서 오그라드는 모순이 아주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연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게 진짜였을까 합니다. 가장 최악의 비겁함은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리하고 거른 그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시선과 생각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술을 마시면 개가 되는 남편의 폭력에 무기력하며 억압과 비아냥을 일상처럼 달고 살던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닳아버린 세대라며 삶에 순응해 버린 사람. 그러다 기성세대에 대한 어설픈 반항으로 삐죽삐죽한 설익은 청년과의 불장난 같은 사랑에 몸을 던집니다. 자신의 불행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기 위해 쥐어짠 용기.


그러나 그것조차도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자신을 폭력으로 끌어당긴-폭력을 당하게 된- 알코올에 의해 점점 더 망가집니다. 그녀 또한 진짜 그를 사랑했는지, 불행을 벗어나기 위한 도구였는지 모르지만 자괴감에 서서히 무너져 갔을 그녀. 나를 벗어나라 하면서도 진짜 그럴까 봐 무서워 술로부터 위안을 찾았을 그녀.

이래저래 벗어나려 하지만 자신의 거미줄에 걸린 거미처럼 종국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요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습니다.



저 소설을 읽을 때, 나는 길고 긴 태풍 속에서 기능은 상실하고 모양만 겨우 남은 난파된 배와 같았습니다. 결국 헤쳐 나왔지만 아직 많이 남아있는 항해가 막막한 때였는데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습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그녀와 나는 삶의 궤적은 너무나 다르지만 태풍 속에서 배가 난파되는 것만큼은 동병상련이다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 읽고 나서의 소감 한 마디, "사랑 참 부질없다."


내 상황에 대한 넋두리는 잠시 제쳐두고 나서 깨달은 것은 그녀는 결국 끝까지 무너졌지만 나는 아직 수선할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여러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지만 꼭 한번 언급하고 싶었던 것은 <연애의 기억>이었습니다. 특히 소설 속에서도 크게 다루지 않는 그녀의 입장만큼은 그녀와 비슷한 연배의 나는 못 본 척하기 어려웠습니다.


소설 속 이야기 속에서도, 중년이 된 남자 주인공의 연애에 대한 기억 속에서도, 작가의 주의력과 시선 밖에서 그녀는 너무 외롭게 남겨졌으니까요.


그녀는 이해받기보다 사랑받기를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녀가 조금 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다면 어땠을까요?



문득,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의 말이 생각납니다.


" I wish love. This is Marlene Dietrich."

(나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이것이 마를렌 디트리히이다.)

- From 그녀의 단 하나뿐인 생전 다큐멘터리 중에서.


그러하니, 당신!

역시 당당히 사랑받길 원하던 마를렌 디트리히처럼.

This is You.

keyword
이전 09화끌림의 서 Chapter 1  피할 수 없는 외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