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둥 Oct 31. 2024

여러 가지 사랑법

 이사를 나간 것도 아니고, 안 나간 것도 아닌 혼란의 현장. 고작 몇 시간 만에 안정적인 배열이 파괴된 집의 모습은 어딘가 기괴했다. 집이 주는 아늑함이란 손 때 묻은 짐들의 적당한 밀도와 무질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던가. 나는 챙겨야 할 짐 중에 혹시 빠트린 것이 없는지 다시 한번 둘러본 다음,  마지막으로 오전동안 굳게 닫아두었던 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시간. 하지만 꼭 한 번은 치러내야 할 시간.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벌써 나를 알아챈 녀석은 부랴부랴 나와서 내 정강이에 사정없이 이마를 부벼댔다. 녀석이 숨어있던 이불 틈으로 동그랗게 자리가 나 있었다. 청소기를 돌릴 때나, 창문을 열어 바깥의 소리가 시끄러울 때, 낯선 사람이 와서 겁이 날 때면 부리나케 숨어 들어가는 녀석의 피난처였다. 자리가 꽤나 따끈한걸 보니 이사가 진행되는 내내 저기에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녀석은 한참 동안이나 내 다리의 앞, 뒤, 옆을 이리저리 오가며 헤드번팅을 했다. 이마와 코를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은지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토닥여달라는 신호다. 걸어가면서 ‘궁디팡팡’ 해주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궁디팡팡’을 하며 구부정한 자세로, 함께 엉망인 거실을 몇 번이고 걸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 소심한 겁쟁이가 놀라지 않고 안정을 찾을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변한 모습도 아무렇지 않고 모든 게 괜찮다는 것을, 오래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녀석은 뒷다리를 굽히고 언제든 도망갈 채비를 한 채, 제자리를 잃은 사물들에 연신 기웃댔다. 호기심과 경계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안방과 화장실까지 점검을 마치고 나서야 별일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다시 이불 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엔 좀 더 편한 자세였다. 무릎을 꿇고 녀석과 부드럽게 눈을 맞췄다. 가만히 녀석을 쓰다듬으니 녀석은 아주 조용히 골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행이고, 고마웠다.


 어릴 땐 자꾸 눈 맞추고, 사랑한다 말하고, 좋아하는 만큼 살을 비비는 것이 사랑의 척도가 되는 줄 알았었다. 좋아하면 그러고 싶으니까. 더 가까이 가고, 더 자주 보고, 더 많이 말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친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녀석을 첫눈에 아주 많이 귀여워했다. 부드러운 솜털이 나 있는 토실토실 살 오른 배 한번 만지고 싶어 안달이었다. 꼭 배가 아니라 그 어디라도 회색빛 털을 마구 뭉그러트리며 비비적대고 안고 싶었다. 그러나 고양이라는 생명체는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좋아하지만 거리를 두고, 체온을 나누려 들면 달아나버리는 게 고양이다. 정갈하게 단장한 녀석의 잿빛 털을 흐트러트리는 대신 여러 시도와 노력 끝에 녀석의 식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물러선 사랑. 존중하는 사랑. 참는 사랑. 말하자면 한 단계 더 성숙한 사랑일 것이다. 내가 이러한 사랑법을 배우는 동안 우리의 관계는 몹시도 끈끈해져서, 녀석도 나에게 조금 더 유치한 사랑을 표해주었다. 다가선 사랑. 격 없고, 격의 없는 사랑. 어느덧 녀석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존재하는 거였다.

 

 그런 녀석이 나와의 마지막 평온을 즐기는 동안, 나는 녀석에게 어떻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하느라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가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난다는 것을 알려주며 인사해야 할지.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을 수도 있는 녀석에게 마지막으로 전할 말을 고르기가 참 어려웠다. 가장 슬프고 힘든 순간에 조용히 옆에 와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어 주던 녀석. 늘 10cm만큼의 간격을 두고 앉던 새침한 네가, 내가 울던 그 밤엔 슬그머니 옆으로 와 살을 맞대어 주었다. 녀석이 내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위안이었다.

 ‘그래, 네가 모를 리 없지’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정말 바보 같은 고양이였기에. 혹시 아무것도 모르면 어떡하나 싶기도 해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우울에 빠져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도무지 그건 안될 일이므로, 나는 솔직하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주기를 택했다. 고양이인 네가 인간인 나의 언어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부디 우리의 마음이 포개어졌던 숱한 시간의 힘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천천히 인사를 전했다.


 

 사월아, 언니는 이제 가야 해. 우리는.. 다시 못 볼 거야. 그래도 사월이는 지금처럼 밥 잘 먹고, 물도 잘 먹고, 신나게 우다다 하고, 화장실도 잘 가고. 골골 노래도 부르면서 그렇게 똑같이 잘 지내. 언니가 사월이랑 헤어지고 싶어서 떠나는 거 아니고, 사냥 나갔다가 죽은 것도 아니니까 너무 슬퍼하면 안 돼. 안보이기만 할 뿐이고, 언니는 멀리서 사월이를 계속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사월아. 꼭 오래오래 건강해야 해. 알았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더 하다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울고불고 엔딩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었기에 남은 말들을 삼켰다. 나의 고백을 들은 녀석은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투명한 호수같이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가도 된다고. 내 걱정은 말라고. 녀석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 정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통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내가 삼켰던 말들 중엔 나중에 무지개다리 앞으로 나를 마중 나와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아마 녀석은 그 말까지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통하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현관을 닫고 나올 때까지 녀석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아주 잠시, 나만 이렇게 아쉬운가 싶어 녀석의 수염만큼 가늘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처럼 나를 따라나서려 하거나, 닫은 문 뒤로 날 찾는 울음을 지으면 내가 더 속상할 걸 녀석은 알았을까. 이번에도 작은 네가, 내게 주는 더 커다란 사랑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이제 닿을 수 없는 멀리에서도 혼자 사랑하는 법을 익힐 차례였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녀석에게 못다 한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 말들의 꼬리마다 녀석이 오래오래 만수무강하기만을 바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