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차 창 밖으로 풍경 보는 걸 좋아한다.
나무는 자꾸 도망가고 달은 자꾸 우리를 쫓아온다고. 내가 네 살 때부터 시를 썼다 주장하는 숙경 씨의 말에 의하면, 달리는 차 창 밖을 바라보는 행위는 30년쯤 묵은 나의 오래된 취미다. 어떤 날은 아예 뒷좌석에 길게 누워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보면서 한 시간 거리를 가기도 했던 한량. 두 발을 모두 뻗어도 좌석 두 칸을 다 채우지 못하던 ‘어린 둥둥’의 이야기다.
매 순간 변하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시간은 ‘어른 둥둥’에게도 여전히 소중해서, 이벤트적인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최대한 충실하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즐긴다. 하늘에 구름이 예쁘거나 환상적인 색깔로 물들 때. 건물 사이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달을 찾을 때. 특히, 계절을 알리는 꽃나무가 길가에 흐드러질 때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제발 한 번만 신호에 걸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운전자가 되어 티 나지 않게 속도를 늦춘다.
그런가 하면 멈추지 않는 풍경이라 더 좋을 때도 있다.유독 지난했던 겨울. 나는 모든 것을 훌훌 흘려보내고 싶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보고 또 봤다. 흘러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뇌를 스치기만 하고 빠르게 달아나는 시각 정보는 그 주변의 다른 저장 정보까지 함께 가져가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버스를 아주 많이 탄 계절이었다.
겨울의 장면들을 흘려보낼 만치 흘려보내고 나니, 거칠고 시리기만 할 것 같던 산과 들에 개나리, 진달래 같은 화려한 꽃들이 피었다. 어김없이 벚꽃 철이 되어 전국이 떠들썩하다, 그 소란이 식을 즈음에는 먼 산에도 벚구름이 조용히 피어났다. 이제 가로에 선 이팝나무에 흰 꽃밥이 수북이 쌓일 차례. 여린 연둣빛 이파리가 서툴지만 제법 단단히 가지에 붙어설 용기를 내고 마는 계절이 온 것이다. 마침내.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는 대추나무와 목련나무가 보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대추나무 잎은 동글동글 반질한 윤을 내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처음 제대로 마주한 집. 도배와 장판을 새로 했더니 걱정했던 것만큼 궁상스러워 보이지 않아서 더 마음이 괜찮았다. 하얗게 변신한 공간으로 구석구석 알뜰하게 짐이 찼다. 작은 집에서 비어있는 모서리란 허락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사 전에 치밀하게 계획해 둔 덕분이었다. 역시 내 집이 되려니 치수도 이렇게 딱 딱 맞나 봐. 하는 생각이 들 때 싸구려 유성 페인트 냄새가 코 끝을 마비시키며 나와 이 집의 관계를 증명하려 들었다. 몰딩 덧칠에 고작 1/4 갤론의 작은 페인트 통 하나도 다 못쓰고 남을 집. 나라면 고민도 없이 저자극 친환경 페인트를 선택했을 일이지만 집주인의 선택은 아니었다. 두 옵션 값의 차이는 고작 만 원 남짓이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현관문과 베란다 창을 활짝 열었다. 5월의 보송한 바람이 온 집안을 휘감으며 페인트 냄새를 안고 나갔다. 냄새는 계속 휘발 중이어서 몇 분 문 열어두는 것으로 두통의 원천이 완전히 사라질 리 없었다. 정리하는 내내 문을 열어두었다. 짐도 어디선가 자꾸 생겨나는 듯했다. 첫날은 대충만 해두려던 정리가 몇 시간째 계속되었다.
- 집이 한참 동안 비어있더니,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구먼. 호호호 반가워요!
열어둔 현관문 앞에 작고 귀여우신 할머니가 지팡이에 휘어진 허리를 의지한 채 서 계셨다. 백발의 할머니는 무구한 표정으로, ‘좋다 좋아. 예쁜 아가씨 옆에 사네. 호호호’ 하시더니 정말 바로 옆 집 문으로 들어갔다. 내 집의 문과 할머니 집 문 사이에는 오직 소화전 한 칸뿐이었다. 할머니도 현관을 열어두신 탓에 기척이 문 두 개 너머로 느껴질 때마다 우리가 한 공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이런 곳에서는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었다. 나와 비슷한 햇수의 계절을 살아낸 이 아파트가 처음부터 친근하게 느껴진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 한 할머니의 등장 씬이라니! 적어도 현대 서울에서는 확실히 보기 드문 장면 덕분에 이 집에서의 첫날을 보내는 마음이 한 층 더 포근해졌다.
어느덧 서쪽 하늘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주고 가신 참외 두 알이 유난히 노랗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