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오락가락, 마음도 오락가락
예전에,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신원사新元寺에 들렀다. 그때의 신원사 이야기다.
흐린 날씨로 망설였던 출발이었다. 갑사甲寺길 이정표를 따라 신원사로 향한다. 공주 쪽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를 거처 신원사로 가는 삼거리 길목이다. 집이 한 채 있다. 길 쪽 문이 멀쩡한 것을 보니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가 기와를 통해 집으로 들어가려고 헛수고한 흔적도 보인다.
지난해에 이어 다시 찾은 오월의 밭은, 보리가 가득했던 작년의 초록 들판을 기억에서 지운 듯이 잘 손질이 되어 있다. 땅은 흙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나 풀들을 키워내기도 하고 거두기도 한다.
땅은 물길을 내어주고, 기어 다니는 것, 걸어 다니는 것, 날아다니는 것들을 위한 길도 허락한다.
바람이라도 불면 보리밭은 초록 물결로 출렁이고, 갈아놓은 밭은 초록 파도로 일어난다.
계룡산 자락의 봄은 신원사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신원사 사대천왕四大天王이 지키는 문을 들어선다. 동쪽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 증장천왕 增長天王, 북쪽 다문천왕多聞天王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있다. 그 모습에 괜히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수고에 대한 감사와 본당에 들게 해 달라는 의미로 두 손 모아 절을 한다.
계단 아래에서 만난 바람은 벌써 사대천왕을 지나 나뭇가지를 흔들며 멀리 사라진다. 익숙한 길이 아닌 곳은 항상 걸음걸이가 늦어지는데, 쉽게 드나드는 것을 보니 자주 오는가 보다.
사대천왕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표정 까지도. 그들은 사찰을 나서는 사람의 발걸음으로 얼마만큼 버리고 가는 지를 가늠한다. 버리지 못한 사람이라도 보면, 축 처진 어깨 위에 법구경 한 구절이라도 얹어두고 싶으리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러나 왜 그리 버리는데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조금씩 비가 내려도 찾는 사람은 찾는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세상 밖으로, 세상 안으로.
또 다른 바람과 함께 사찰로 들어선다.
열린 앞마당, 석탑 하나, 멀리 놓인 대웅전 건물. 단출하다. 어제까지 잘 말려서 앞마당에 펼쳐 놓은 잔디가 봄비에 젖어있다. 몇 걸음만 옆으로 옮기면 석탑이 들어왔다가 나간다. 마음에 석탑 하나 들여다 놓는 것이 이렇게 쉽다. 활짝 핀 영산홍이 대웅전을 감싸고 있다.
대웅전이 불타고 있다. 신원사가 불타고 있다. 간간이 비가 내려도 불타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얇은 봄비에 사람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큰 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이곳에, 해마다 이만 때쯤이면 사진사가 제일 좋은 포토존을 차지하고 있다. 낡은 사진첩 속의 사진은 같은 배경에 다른 사람들로 꽉 차있다. 예전에는 사진 찍는 손님이 많았으나, 지금은 없다고 한다. 사진기의 시간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사진기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삼각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곳의 세월에서 너무 멀리 지나와 있다. 돌아갈 수도 없다. 그곳, 사진사의 사진기는 '찰칵'하는 자기의 셔터 소리를 잊은 지 이미 오래다. (다음 해부터 사진사가 안보였다. 신원사를 찾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신원사의 사진기 셔터 소리를 잊었다.)
잠시 비가 내리고 하늘은 짙은 무채색이다.
비가 지나가니 모든 게 맑고 색이 짙다. 앞마당 잔디도, 나무도, 고인 물도.
젖은 석탑이 참 아름답다. 비에 길이 막혀 떠나지 못한 바람이 나 같이 머물러 있다.
살아있는 욕심 때문에 버리는 것이 어렵다. 비우기가 채우기보다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채워도 답답하지 않도록, 더 채울 곳이 없도록 하기도 어렵다. 여기에서는 버리려고 왔으면 그리하고, 채우려고 왔으면 또 그리하라고, 대웅전 추녀 끝에서 내려앉은 佛心 깊은 풍경소리가 전한다.
석등 옆 움푹 파인 곳에 빗물이 가랑가랑 고여 있다. 고인 빗물에는 하늘이 담겨 있다.
누가 채우고, 누가 거두어 가는 것일까.
어느 길을 선택하든, 신원사 옆에 위치한 계룡산산신재단인 중악단中嶽壇에 이른다. 절집이 아니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도 중악단이란 현판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건물구조가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눈썹 하얀 계룡산 산신이라도 중악단에 들려면 거쳐야 하는 구조다.
신원사 근방에는 굿 당이 많다. 계룡산 큰 산신이 나라의 큰 기원을 위해 중악단에 들 때면, 가끔은 따라온 작은 산신들이 굿당에서 근처 백성들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었나 보다. 그런 산신들을 서로 모시려다 보니 신원사 근방에는 굿 당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긴 세월 동안 계룡산산신을 따라다니다며 보고 배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이니, 아마 효험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가끔은 天機도 힐끔 쳐다보기도 했을 것이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흐린 구름 하늘 사이로 햇살이 든다. 두 눈을 크게 뜨지 않고 걸음을 옮겨야 햇살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다. 계룡산 산신이 출타 중인지 안쪽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돌아서서 나가는 길은 같은 길이나 또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되돌아보게 된다.
중악단을 나서면 넓은 빈 터가 있고. 그 속에 밭도 보인다. 가장자리에는 절 마당에 들지 못한 석탑이 하나 있다. 층층 어깨에는 검버섯 같은 이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참 험한 세월을 지낸, 덩치에 비해 소심한 모습이다. 그러나 활짝 핀 산벚꽃이 곁에 서 있어 덜 부끄러워한다. 잘 지켜달라고 옆의 나무를 토닥여 주었다. 석탑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지문을 살며시 남겨 놓았다. 언젠가 절 마당에 들면 서로 알아볼 수 있게.
돌아 나온다. 다시 날이 흐려지고, 산은 거친 숨을 몰아쉰다. 구름안개가 흩어지며 천천히 사라진다.
다시 비가 내린다.
이를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