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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Aug 21. 2022

골칫거리 꼬마들

연재 소설

 오침 시간이 끝나고 오후 업무 시작. 오늘도 예외 없이 자재부는 도떼기시장이었다.          

  “신 대리, 대체 그놈의 레미콘은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작업 준비는 다 해 놨는데 레미콘이 와야 뭘 어떻게 해 먹을 거 아닌가!!”

  1공구장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신 대리를 다그쳤다.

  “네? 레미콘이 아-안 왔단 말이에요?”

  신 대리가 말을 더듬었다.

  “오전 내내 목이 빠지라 기다렸지만, 소식이 깜깜이지 뭐야. 미치고 환장하겠다고!”

  “이놈의 새끼 정말 미치겠군.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는······.”

  언제나 그렇듯 신 대리는 몇 번이나 업자에게 다짐을 받아놨던 터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구장님. 다시 쫓아가 볼게요. 오후에는 골재장엘 가려고 했는데, 먼저 레미콘 공장을 들러야겠네요.”

  신 대리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았다. 그는 잊을만하면 업자가 약속을 어겨 그때마다 현장에서 닦달하는 통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거래처를 바꿔도 봤지만, 이놈이나 저놈이나 거기서 거기니 대책이 서질 않았다.          

 

  “서형, 좀 더 찾아봐 줘요. 이거 없이는 물건을 제작할 수 없는걸.”

  워크숍 한 기사가 며칠째 부국을 졸라댔다.

  “한 기사 심정 충분히 알아요. 나도 잊지 않고 계속 찾고 있고. 그렇지만 다른 현장 일을 제쳐 놓고, 워크숍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뇨?”

  부국은 언제나 워크숍 청구 물품에 애를 먹었다.     


  “여 과장, 도착했다는 게 두 달이 돼가는데, 아직도 물건이 안 들어오니 어떻게 된 거요? 당장 다음 주면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성질 급한 4공구 정 공구장이 식식거렸다.

  “공구장님 속 끓는 거 잘 알지만, 전들 어쩔 도리가 없네요. 한 달 반 동안 하역하느라 속이 숯검정이 됐는데, 이번에는 세관 놈들이 인샬라, 인샬라만 주절대니 속 터져 죽겠습니다. 얼굴이라도 자꾸 디밀면 낫겠거니 하고 2주일째 매일 세관 출근합니다. 오늘 오전에도 눈도장 찍고 왔고요.”

  사우디는 물동량 폭증으로 화물 적체가 극심한 데다 사무처리가 늦어, 국산 자재 반입 업무를 하는 여 과장과 제3국 자재 담당 박 차장은 골치를 썩였다. 뻔질나게 하역장과 세관을 찾아가 닦달하지만, 사우디 관리들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자재부 역할은 열차로 말하면 연료를 공급하는 일이다. 다섯 열차가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신속하게 연료를 공급해야 하는데, 현장에서 요구하는 품목이 워낙 다양한 데다 급하게 몰아쳐서, 구매 요원들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2공구는 웬 꼬마전구 하며 워닝 램프를 그렇게 많이 잡아먹나?”

  막 사무실에 들어서는 2공구장에게 최 소장이 말했다.

  포클레인으로 땅을 굴착하고 나면 관로를 따라 안전 펜스를 설치하는데, 1m 간격으로 꼬마전구를, 10m 간격으로 워닝 램프를 달게 돼 있었다.

  유 공구장이 호흡을 가다듬고 줄줄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습니다. 동네 꼬마들이 밤이면 전구 깨기 놀이를 하나 봐요. 아침에 나와 보면 돌멩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거든요. 새로 달아 놓아도 다음 날이면 난장판이 돼 있으니 미칠 노릇이죠. 당장 내일 아침에 갈아 낄 것도 없다니까요.”

  “허 참, 보통 일이 아니구먼. 꼬마전구는 그렇다 쳐도, 워닝 램프는 개당 100리얄이나 하는데, 하루 열 개는 잡아먹으니 돈이 얼마냐 말이야.”     


  이것은 비단 2공구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2공구 시공 구간이 주택가라 먼저 매를 맞을 뿐, 외곽에서 공사 중인 다른 공구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

  “밤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 뾰족한 방법이 있어야죠." 

  “그렇다고 매일 1,000리얄을 깨 먹고 있을 순 없잖나. 어떻게든 대처방안을 강구해 봐."

  "그렇긴 한데  뾰족한 수가 없으니. 가정집에 들어가 부모에게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어쨌든 깨지는 건 그때그때 갈아야 하니, 박 차장, 창고에 꼬마전구와 워닝 램프를 비축하도록 하게.”

  "네.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박 차장 대답을 듣고 난 최 소장이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했다.

  ‘제기랄, 꼬마들 놀잇감까지 쌓아 놓고 대기해야 하니, 원.’          


  그동안 예기치 못했던 일로 실행 예산이 연달아 펑크가 났다. 밑 빠진 독처럼 쏟아붓는 물값, 블랙홀처럼 돈을 빨아들이는 모래값, 이번에는 꼬마들의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다.     




  부국은 워크숍 물건을 한 번 더 찾아봐야겠다며 베어링 상점들이 있는 쪽으로 가고, 무길은 담맘 일렉트릭 하우스를 찾았다.

  “하이, 꼬리 친구!”

  점원인 오마르는 ‘앗 살라 무 알라이 쿰’ 대신 언제나 ‘하이, 꼬리 친구!’로 인사에 대신했다.

  “오늘은 또 무슨 임무를 띠고 오셨나?”

  “꼬마들 놀잇감을 사러 왔다네.”

  “꼬마들 놀잇감?”

  오마르의 눈이 동그라졌다가 무길의 설명을 듣고는 덩달아 맥 빠진다는 듯 말했다.

  “그래, 매일 아침 새것으로 갈아 낀단 말이야?”

  “어쩌겠나. 안전 펜스 규정은 지켜야지.”

  “꼬마 녀석들은 좋겠네. 신나게 깨뜨려 버렸는데 다음 날이면 또 놀잇감이 걸려있으니. 꼬리 아저씨들은 친절하기도 하다면서 말이야.”

  오마르가 혀를 찼다.

  “망할 녀석들 같으니.”      

  무길은 오마르를 대하면 고향 친구처럼 마음이 푸근했다. 사람의 만남에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오마르와의 첫 만남은 특별했으니, 그날의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부국이 오기 전날이었다. 업무가 시작하자마자 워크숍 실장이 직접 소형 모터를 들고 왔다. 구조물 공사에 투입할 특수 봉을 제작 중인데, 이 모터 고장으로 공작기계 가동이 중단됐다는 것이었다. 특수 봉이 없으면 1공구는 다음 주부터 작업을 못 한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영국 제조사로부터 부품을 조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급해 어떻게든 현지에서 구해야 한다고.

   무길은 난감했다. 자동차도 고장 나면 그대로 버리는 나라에서 완제품이 아닌 소형 부품을 구해오라니. 


  오전 내내 모터 가게는 물론 기계류, 전기상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한결같이 없다 하고,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도 상인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작업자들이 손 놓고 있을 1공구 현장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답답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쌀라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급한 물건이나 챙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알 와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골목 안쪽으로 처음 보는 전기 상회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저런 가게가 있었네. 왠지 호기심이 당겼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담맘 일렉트릭 하우스’ 간판이 붙은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혹시, 이런 거 있습니까?”

  샘플을 내밀어 보였다. 

  상품을 정리하던 점원이 힐끗 보더니, “없는데요.”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또 한 번 같은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휴-우’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흘리며 돌아 나갈 참이었다. 점원이 그의 한숨 소리에 그랬는지, 다시 한번 보자며 샘플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미쳐 생각 못 했다며 자기 친구가 일하는 가게에서 본 기억이 있다는 게 아닌가!

  무길의 귀가 번쩍했다. 오 마이 갓! 그는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가는 길을 설명하는 점원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한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 지리에 어두웠던 탓에, 점원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반복 설명하던 점원이 머리를 흔들며 돌아섰다. 무길의 가슴이 철렁했다.···이젠 그만인가.   


   근데 그게 아니었다. 점원이 직접 그곳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자기 가게는 놔둔 채 앞장서는 게 아닌가!

  그때의 고마움이 어떠했으랴. 그때만큼은 현지인들이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행동이 느리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았다. 

  오마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골목을 돌고 돌아 한참을 걸어갔다. 그들은 빗물처럼 쏟아지는 땀을 닦아내며 헉헉댔다. 무길은 생각지 않게 만난 귀인으로 한껏 기대에 차 있었지만 오마르의 가게에 신경이 쓰였다.

  “가게를 비워놔도 괜찮을까요? 누가 물건을 집어 가면 어떡하죠?”

  그러나 오마르는 무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태연하게 답했다.

  “누가 남의 물건을 건드리나요. 쓸데없는 걱정이죠.”

  오히려 말을 꺼낸 쪽이 무색해졌다. 사우디는 도둑이 없다더니 이 정도란 말인가. 그래도 또 다른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손님이 왔다가 주인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는 무사태평이었다.

  “손님이 돌아가고 안 가고는 신의 뜻입니다. 신의 뜻이 있으면 또 오겠지요.”

  무길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자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더는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찾아간 상점 점원이 가게 한구석에서 모터 하나를 가져왔다. 무길이 받아 샘플과 대조해 봤다. 분명, 같은 물건이었다, 분명히. 이놈이 여기 숨어 날 애 먹였구나!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고 하늘이라도 날 것 같았다. ‘때로는 구매 요원이 일당백’이란 말이 바로 이거구나.     


  돌아오는 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오마르에게, 누차 고맙다며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내가 아니라 누구라고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가게로 돌아오자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다 만 상품 진열을 계속했다.     


 그 후부터 무길이 전기용품은 오마르의 가게에서 구매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다른 상인들과 달리 일 처리가 신속했다. 전기류는 스펙이 복잡해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은데, 그에게 가면 간단히 해결됐다.      

  그는 한국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다. 특히 국제개발의 상하수도 공사는 담맘 시민에게 신세계를 열어줄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막에서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야.”

  오마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꼬리는 알라신이 보낸 천사야.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있으니. 당신들은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는 이 대륙을 흔들어 깨우고 있어.”라고 했다. 

  근데 이 말을 할 때면 그에게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났다.      




  부국은 마침내 워크숍 물건을 찾아냈다고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이렇게 며칠 동안 한 건에 매달리다 보면 일이 밀리게 마련인데, 속 모르는 박 차장은 일 처리가 늦다고 구박이라며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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