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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Jan 15. 2024

필멸의 방정식(21)

눈을 떴을 때, 유진은 수조에 갇혀 있었다. 반투명한 액체 때문에 바깥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감각이나 몸이 떠오르는 듯한 기묘한 부유감이 그녀가 물속에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지독한 무기력함과 어머니의 자궁에 있는 듯한 안락함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기에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다. 호흡을 위한 마스크와 줄이 거슬렸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혈관을 돌고 있는 알 수 없는 성분 때문인지 자꾸만 생각이 끊겼다. 그녀는 다만 기철이 걱정될 뿐이었다.


잠에 들기 직전의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자 오랜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처음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과의 기억이었다. 부모님은 유진과 기철의 설득에도 시술을 받지 않았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는데 이제와 떠올리려 보니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냉정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들과 보낸 시간이 겨우 백 년 남짓이니 그럴만했다.


기억은 그림이 처음 팔렸을 때로 흘러갔다. 미대를 졸업한 후 의미 없는 붓질만 계속하던 유진은 어느 날 자신의 그림을 사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술을 받기 전, 아주 오래된 기억이지만 너무나 생생하다. 그날의 날씨, 시간, 벅찬 느낌까지, 그녀가 그 순간은 잊을 리 없었다. 기철을 처음 만난 순간이었으니까.


전화는 해가 제일 높아지기 전, 그러니까 11시 30분 즈음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한심한 자신을 탓하며 전날 홀로 술을 마시며 청승을 떨다 작업실에 잠이 들었었다. 전화 소리는 두꺼운 숙취의 벽을 뚫고 귓가를 날카롭게 찔러왔다. 전화올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베개로 귀를 틀어막으며 몇 번이고 울려대는 전화를 무시했다. 베개를 뚫고 머리를 울려대는 전화 소리에 참을 수가 없어 이불을 박차고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5번 정도 더 전화가 울렸을 때였다.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14통이나 찍혀 있었다. 발신인은 수빈, 수빈은 그녀의 대학 동기이자 미술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과감히 아트딜러의 길로 전향한 친구였다. 그녀와 나름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서로에게 애정을 표할 사이는 아니었기에, 유진은 의문과 약간의 짜증을 섞어 전화를 걸었다.


"뭐 하길래 전화를 안 받아!"


안 그래도 톤이 높은 목소리를 가진 수빈이 화를 내자 음질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착신음보다 더 불쾌한 소리가 들려 유진은 귀에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한참을 씩씩대던 수빈이 진정한 기미를 보이자 유진은 다시 전화기를 얼굴에 붙이며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어."


"뭐? 빨리 받았으면 많이 할 일도 없었잖아! 또 술 마시고 뻗어 있었지? 뻔하다. 뻔해."


유진은 자신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친구의 말에 약간 빈정이 상해 삐딱한 말투도 대답했다.


"용건이나 말해. 급한 일 아니면 끊고. 네 말마따나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수빈은 그런 유진의 태도에 그리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약간 기뻐 보였다.


"그거 알아? 나는 네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아봤다는 거?"


생색이라도 내려고 전화한 건가. 유진은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알지, 유일하게 내 그림을 판매하는 딜러잖아. 그거 하나 말하려고 이렇게 전화를 많이 한 거야?"


"설마! 그런 시답잖은 일로 전화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아."


전화기 너머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꾸 시간을 끄는 것을 보니 쉽게 알려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별일 아니면 문자로 해. 나 피곤하니까."


"아! 잠깐! 끊지 말아 봐. 넌 대학 다닐 때는 안 그러더니, 왜 이렇게 까칠해졌니? 친구가 널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데."


유진은 수빈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수빈의 노력은 알고 있지만 지금은 받아줄 힘이 없다. 비단 숙취 때문이 아니라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자신의 애매한 재능이, 그리고 벌써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성장한 친구에게 느끼는 열등감이 그녀를 점점 구렁텅이로 끌고 갔다. 대답이 없자 수빈은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네가 팔아달라고 요청한 그림 있잖아. 달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거. 그 형형한 색감이며 녹아내리는 것 같은 형태가 나는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 그림을 좋게 보는 사람이 있었어."


유진은 갑자기 숙취가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몽롱한 정신이 번쩍 뜨이며 전화기를 댄 관자놀이가 터질 것처럼 두근댔다.


"그래서 내가 열일 제쳐두고 그 그림을 팔기 위해 동분서주했거든. 그랬더니, 세상에! 오늘 아침 구매자가 나타난 거야! Cade에 다니는 연구원이라는데 자기 집에 둘 그림을 찾다가 내 판매 목록을 봤대. 네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


그 뒤부터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유진은 전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전화기에서는 계속 '여보세요?' '들려?' 하는 수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찾아왔고, 인정을 받았다는 벅참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이제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당당하게 홀로서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구매한 사람이 누군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자신의 그림은 팔릴만한 그림이 아니었다. 틀에 박힌 형식을 벗어나겠다며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잡이로 칠한 연습장 같은 것이었다. 수빈에게 그 그림을 넘긴 것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컸다. 누구길래, 어떤 독특한 취향을 가졌길래 이 그림을 산 건지 궁금했다. 유진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전화기를 집어 들고 급하게 말했다.


"그림, 아직 안 넘겼지? 나 구매자랑 만나고 싶어."


유진과 기철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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