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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Jan 17. 2024

필멸의 방정식(22)

기철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름 꾸민다고 머리에 왁스를 발랐지만 관리를 하지 않고 덥수룩하게 길러 오히려 지저분해 보였고, 입가에는 수염을 급히 깎은 탓인지 핏자국이 말라 거뭇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옷은 또 어찌나 안 어울리게 입고 왔는지, 마른 몸에 비해 큰 옷은 사회 초년생이 아버지 정장을 빌려 입고 나온 것처럼 보이게 했다.

"기철이라고 합니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고요?"


그래, 목소리는 합격. 사실 지금에 와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리 좋은 목소리는 아니다. 사람과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티가 날 정도로 바짝 마른 저음의 목소리. 하지만 겉모습이 영 시원찮아서인지 목소리만큼은 좋게 들렸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닌데. 선보려고 만난 거 아니잖아. 왜 외모를 평가하고 있어. 외모가 어떻든, 목소리가 어떻든, 이 사람은 내 구세주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감사를 전해야지. 유진은 작게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기철에 대한 평가를 지우려 노력했다.


"예, 제 그림을 구매한다고 하신 분 맞으시죠? 너무 궁금해서 만나 뵙고 싶었어요. 제가 그리긴 했지만, 팔릴만한 그림이 아니거든요. 그 그림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면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알고 싶어서요. 피드백 같은 게 받고 싶어요. 아! 매력이라는 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 이야기입니다. 물론 제가 그렸으니 제 매력의 일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순전히 그림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내가 뭐라고 하는 거지? 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되지도 않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유진은 민망한 듯 두 손으로 붉어진 볼을 감쌌다. 그림이 팔린 일은 좋은 일이지만 자신이 그린 그림인 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냉정해야 했다. '냉정'하게 자신의 그림은 팔릴만한 그림이 아니었다. 수빈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에 한동안 들떠 스스로의 재능을 격려했지만 열기가 가라앉은 후 둘러본 작업실의 그림은 형편없었다. 저 삐져나온 선 좀 보라지. 벌써 십 수년간 그림만 그렸는데 기초적인 선 하나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서 그림 하나 팔렸다고 기뻐하는 거야? 그녀의 등 뒤로 오랜 시간 함께한 불안과 자괴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과거로 돌아가 들뜬 마음에 구매자를 만나고 싶다 외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과거로 돌아가 그림을 시작하지 못하게 붓을 전부 꺾어놓고 싶었다.


슬쩍 바라본 기철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힐끗 봐도 시시한 사람이다. 아마 연구 비슷한 일을 하며 자기 공간에 갇혀 사람과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림처럼 음침하고 우울한 그림을 사려했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부끄러움에 등줄기가 따끔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사러 온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추악한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다. 부모도, 판매 대행을 맡은 수빈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실낱같은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다. 그 안에서 무언가 영감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한심한 생각을 품다니. 그녀는 기철과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그보다 나을게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다. 적어도 그는 돈이라도 벌지 않는가.


한동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기철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턱을 괴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유진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선생님 눈치를 살피듯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문득 안경을 가득 채우는 그의 눈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을 깬 것은 기철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결심한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는 헛기침을 하며 유진의 주의를 끌었다.


"그림을 왜 구매하려는지 물어보신 거죠?"


"예."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한동안 연구에 빠져 연구실에 살다 집에 들어가니 집이 너무 휑하게 느껴지더군요."


역시나 그렇겠지. 그런 그림을 사는데 거창한 이유 따위가 있을 리가. 감상하는 사람이 작가의 의도를 짚어내고 그에 깊이 공감하리라는 착각은 작품을 만들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다. 이제 와서 그런 무신경함으로 상처받지는 않는다. 두뇌를 꺼내 자신의 의도와 노력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니 마냥 감상자를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 입장에서 고뇌의 시간 끝에 기막힌 작품을 만들었는데 날카로운 비판이 날아오면 솔직히 버티기 힘들다. 그래서 창조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다. 유진의 경우는 무관심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녀는 계속하라는 의미로 손을 살짝 올렸다.


"보다시피 저는 예술에 그리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닙니다. 휑한 집안을 꾸미려 가구도 들이고 홀로그램 난로도 피웠지만, 평생 정답이 정해진 문제와 씨름하다 보니 그런 감수성도 메말라 마음에 확 꽂히는 느낌은 없더군요. 뭐가 문제일까 한참 고민했습니다. 아마 문제는 저 자신이겠지요. 그래서 그동안 사라진 감수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침 프로젝트도 궤도에 올라 제가 할 일이 없어져 장기 휴가를 받은 참이었기에 시간은 여유로웠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베란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습관을 들였고 저녁을 먹은 후 가까운 공원으로 매일 산책을 나갔습니다. 이외에도 이것저것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 자신이 문제였으니까요. 소심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무대에 자신 있게 설만큼 강단이 길러지지는 않는 것처럼 저도 원래부터 감수성이 둔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간의 노력에서 얻은 유일한 성과인 셈이죠. 그러다가 그 판매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성함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수진 씨였던가."


"수빈, 최수빈이에요."


"맞아요. 수빈 씨. 수빈 씨를 만났습니다. 니시무라에게 소개를 받았거든요. 아, 니시무라는 제 친구입니다. 동료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제 고민을 듣고 대학 시절 아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네요. 역사 동호회를 같이 하는 친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에게 부탁한 겁니다. 그 친구가 바로 수빈 씨였고요."


발이 넓은 수빈이라면 아는 사람이 많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나저나 니시무라는 들어본 일이 없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느라 인간관계가 좁은 유진의 대학 시절 친구라면 수빈의 친구들이 전부이고, 그렇다면 그녀도 알 법도 한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수빈 씨는 연락을 받자마자 당장 구경 오라고 하시더군요. 실행력이 꽤나 빠른 분이었어요. 붙임성도 좋고요. 그녀를 보고 느꼈습니다. 세일즈는 저 같은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요. 수빈 씨의 매장은 작지만 꽤 훌륭했습니다. 대부분의 그림은 습도와 온도가 관리되는 창고에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일부만 그림을 돋보이게 만드는 새하얀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편히 둘러보라 하시더군요. 하지만 문외한이 무얼 알겠습니까. 봐도 영문을 모르겠는 그림뿐이었습니다. 그런 그림을 집에 걸어놔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나가려던 찰나 당신... 그러니까 유진 씨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이때 유진은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건강하게 제 할 일을 하던 녀석이 갑자기 미친 듯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심장을 달래려 물을 들이켰지만 오히려 차가움에 놀란 뇌가 심장의 박동을 더 뚜렷하게 인식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철은 황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감히 평가하는 게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유진 씨의 그림은 달랐습니다. 솔직히 저 같은 사람은 조형 요소라든가 원리 같은 건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유진 씨의 그림에는 그런 저조차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확실히 수빈 씨가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당신 그림을 걸어놓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동안 못 박힌 듯 그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구매하여 집에 들고 왔습니다. 포장이나 여러 절차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당시 제 머리에는 그림을 당장 집에 걸어두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유진은 날뛰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제 그림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신 거죠?"


"그건 저도 모릅니다. 물론 알 수는 있었겠지요. 인간의 감정이란 것은 연구자인 저에게 전기 신호에 불과하니까요. 그 신호를 측정해서 해석하면 원인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모른다는 생각까지 포함해서 그 작품을 온전히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본 순간부터 그 그림은 제 것이 되었고 저 또한 그 그림에 종속되었습니다. 그 충만함과 벅참은 겨우 수식이나 문자 따위로 변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철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번에는 안경을 고쳐 썼다. 점점 그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당신을 보니 제가 느낀 감정의 일부를 명확하게 이해한 느낌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이해입니다. 해석에 이해가 포함된다고 하지만, 지금은 둘이 명백히 다르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냥 그런 기분입니다. 머리가 저릿한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아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유진은 기철의 다음 대사가 무척 궁금해졌다. 그는 아이처럼 순수하게 빛나는 눈으로 유진의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 눈빛을 피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그와 그녀만이 있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지요?"


"네..."


"이제 보니 그게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만나고 싶었던 겁니다. '명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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