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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Jan 22. 2024

필멸의 방정식(23)

유진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살며시 눈을 떴다.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 정신의 무기력함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마 기철은 그녀를 초인, 혹은 타고난 예술가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초인도 아니고 타고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끼며 약간의 우울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작품이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순전히 기철 덕분이었다. 그와 있을 때 영감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곤 한다. 자신의 첫 작품을 구매해 준 구매자였을 때부터 기철은 그녀의 뮤즈가 되었다.

그를 생각하자 또렷하게 정신이 들었다. 그래, 시장의 난리통에서 기철을 놓쳤어. 그리고 누군가 나를 제압하고 데려갔지. 수면제라도 맞은 것 같아. 아주 강한 녀석으로. 기억나는 거라곤 점멸하는 녹색의 등과 짜증 나게 웅성대는 사람들이야.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저 사람들은 누구고? 자꾸만 눈으로 물이 들어차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정신을 집중하니 흐릿하게나마 수조 밖을 볼 수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두꺼운 유리에 막히고 그녀를 둘러싼 물에 막혀 산산이 흩어진다.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짜증이 솟구쳐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억지로 휘저으며 수조에서 나가고 싶음을 피력했다.


그녀가 움직이자 수조에 연결된 기계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소리가 어찌나 날카롭고 큰지 두꺼운 벽과 물을 뚫고 그녀의 귀에 전달될 지경이었다. 물 안 가득 소리가 떠다니며 그녀를 옥죄는 것 같았다. 유진은 점점 불안해져 더욱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그녀가 몸부림을 칠수록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중 키가 작은 사람이 다그치며 누군가를 불러오라는 듯 크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자기 상반신만 한 가방을 들고 와 기계를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유진은 기계음이 자신의 난동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소리도 지르고 싶었지만 목에 무언가를 박아놓은 듯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파란 옷의 남자가 무언가 설정을 건드렸는지 불투명하던 시야가 투명하게 변했다. 여전히 눈은 따끔했지만 시야가 제대로 트이니 한결 나았다. 음산하게 웅얼거리던 소리도 조금은 깨끗하게 변했다. 그녀는 지금의 변화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투명해진 수조 앞으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안경을 고쳐 쓰고, 무언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아쿠아리움의 좁은 수조에 갇힌 열대 어류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실험체 003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수조가 문제인가?"


지시를 내렸던 작은 키의 남자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안경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불쾌해진 유진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여 중요 부위를 가렸다. 그러자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라? 다들 봤나? 지금 스스로 몸을 가린 거야?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이봐! 지금 설정값이 어떻게 되어있지?"


파란 옷을 입은 남자가 기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예, 투명도 100으로 올렸습니다."


"누가 그거 물어봤어? 이 멍청한 자식아?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까 지원팀이나 하고 있지. 실험체 설정값 물어본 거 아니야!"


유진은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투명도니 실험체니 설정값이니.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던 그녀에게는 너무 낯선 단어였다. 파란 옷을 입은 남자는 키가 작은 남자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일반 실험체보다 마약성 약물 투여율을 줄였습니다. 실험체 자아가 무너지면 괴물이 된다고 하셔서..."


"얼마나 줄였는데?"


"요청하신 약물량은 이전보다 반절 정도 줄인 양입니다."


키가 작은 남자는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유진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그의 핥는 듯한 시선이 불쾌하고 부담스러워 그녀는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직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 이건가...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아.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 시술을 받아서 육체에 대한 자아상이 너무 강한 탓도 있는 것 같군. 현재 자기 육체를 보면 큰 충격에 빠질 텐데 말이야. 그럼 자아가 붕괴될지도 몰라. 역시 개체 수준에서 이 정도 정보량은 감당하기 어려운 건가."


그의 탐색하는 듯한 태도는 더욱 심해졌다. 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몸을 돌리고 최대한 웅크렸다. 그런데 몸을 동그랗게 마는 순간, 그녀의 눈앞에 강철로 만든 거미 다리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모였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수치심도 잊고 몸을 바로 세워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강철 다리는 사라지지 않고 그녀 앞에서 손짓에 따라 좌우로 움직일 뿐이었다. 유진은 천천히 손을 뻗어 강철 다리를 만져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그리고 묵직한 촉감이 손을 통해 뇌로 전달되었다. 순간 그녀는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까부터 목 부분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절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 익숙한 강철의 질감이 느껴졌다. 떨리는 몸을 돌려 키가 작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의 안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음침한 미소를 지은 남자는 수조에 천천히 다가갔다.


작은 안경알에 거미가 담겼다. 징그러운 기계 다리가 혼란스러운 그녀의 상태를 대변하듯 제멋대로 수조 안을 헤엄쳤다. 한바탕 소리가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잠깃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공기 방울이 그녀의 입을 통해 빠져나갈 뿐이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정신이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옅어지는 시야 사이로 올라가는 공기 방울을 보았다. 기철이 사라질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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