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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Feb 26. 2024

필멸의 방정식(24)

꿈속에서, 유진은 기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기철은 그녀를 끌어안으려 몸을 움직였지만 물속에서 걷는 듯 움직임이 더뎠다. 유진은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다. 기철이 다가가는 속도에 맞춰 조금씩 뒤로. 그가 한 발자국 다가서면 그녀는 두 발자국 물러난다. 조바심이 일어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지만 목구멍이 막히기라도 한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진이 기철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 품에 안기고 싶어 가지 말라 애원하고 빌었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유진과 기철 사이에는 벽이 있다. 보이지 않지만 통과할 수 없는 애원의 벽. 원래 둘 사이에 벽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완벽한 한쌍이었다. 한 명이 생각하는 것처럼 함께 움직였고, 아침의 공기만으로 상대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벽이 생겼다. 누구의 잘못에 의해 생겼는지 따지는 게 무의미한 절대적인 타의의 벽이 둘을 갈라놓았고 한 몸이었던 기철과 유진은 애타게 서로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마침내 유진이 기철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일어났나."


망령이 말을 건다. 그는 곤히 잠든 기철의 옆에서 자신의 기계 팔을 수리하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만큼 피로가 쌓여있었나 보다. 기철을 머쓱한 듯 주춤거리며 일어나 자연스레 총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총을 만지는 그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계속 유진이라는 이름을 부르던데, 많이 그리운가."


기철은 망령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총기를 닦았다. 잦은 격발로 탄매가 총구를 넘어 총몸에까지 끼어있다. 탄매와 먼지를 제때 제거하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 격발시 문제가 생긴다. 기철은 헝겊을 내려놓고 주머니칼을 꺼내 탄매를 긁어냈다. 망령은 오늘만큼은 평소의 과묵함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는지 계속 기철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테러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실험체가 있을만한 곳을 위주로 진행했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어. 니시무라라는 자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그렇다면 그녀가 있는 곳은 올웨니 곁이 되겠지. 우리의 다음 목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올웨니, 그에게 간다면 유진을 만날 수 있는 것일까. 니시무라에 대한 정보도 그곳에 있는 것일까. 기철을 이제 다시 헝겊을 꺼내 WD-40을 조금 뿌려 총을 닦기 시작했다. 반질거리는 총몸을 보니 잠기운과 잡념이 조금씩 밀려나며 이성적인 사고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기철은 한 달 동안 망령을 따라다니며 능숙한 전투원으로 거듭났다. 그는 더 이상 총을 장전할 줄도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훌륭한 전사가 으레 그렇듯, 그 또한 전투의 강렬한 트랜스 상태 이후 쏟아지는 냉철한 판단에 중독되어 있었다. 기철은 그 상태에서 평소 볼 수 없는 것을 보았고, 과거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현재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짜인 자신이 격렬한 전투에서 계속 살아남는 것도, 꽁꽁 숨겨놓아야 할 실험실에 대한 정보를 너무나 쉽게 얻어내는 것도, 그리고 테러로 인해 Cade의 민낯이 세상에 빠르게 알려지는 것도 그렇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일이 쉽게 풀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Cade를 비롯한 현재 세계 질서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의지의 소유자가 그들을 전면에 내세워 방아쇠를 당기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기철은 리처드 박사, 그리고 니시무라가 속해있는 저항군을 의심했다.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살아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저항군의 규모나 인프라가 Cade에 비할바가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저항군이 Cade 만큼의 세력을 확보했다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나서 전면에 서면 된다. 하지만 저항군은 굳이 어려운 방법을 택했다. 저항군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항군이 아니라면 굳이 Cade에게 반기를 들 정신 나간 생각을 하는 단체는 없을 것이기에 그는 자신을 조종하는 주체가 저항군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망령과 기철이 인지할 수 없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을 유도하고 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으로 여겨지듯 기철은 자신의 행보가 유진을 찾기 위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떠한 존재의 의지를 대행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망령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기철은 알 수 있다. 그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망령씨. 당신의 목적은 뭔가요?"


망령은 별 말을 다 한다는 듯 기철을 야릇하게 노려보며 대답했다.


"Cade를 박살 내는 것. 적어도 소말리아에서 몰아내는 것."


"저는 이 행보가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 않을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일이 아주 잘 풀려 소말리아에서 Cade를 몰아내고 나는 유진을, 당신은 니시무라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어떤 존재가 그린 그림의 아주 러프한 스케치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그런 느낌이요. 누군가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어요. 당신도 느끼지 않나요? 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을?"


망령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괴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흉악한 기계 팔을 들어 매끈한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 이전에도 너처럼 헛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


"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건 상관없는 일이야. 우연? 전장에서 우연은 고마운 일이야. 아주 조금만 삐끗하면 베테랑도 한순간에 죽어나가는 곳이 전장이라고. 우연이 필연으로 느껴질 정도로 반복되면 이상함을 느낄게 아니라 감사하다고 생각해야지. 그리고, 스케치여도 괜찮아. 그 존재라는 녀석의 목적이 무엇이든 나는 내 목적을 이루기만 하면 돼. 그 뒤는 내 알바 아니다."


"그로 인해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해도요?"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해도."


기철은 그와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그는 현실에 메여있는 사람이다. 그의 영혼은 육체가 하나씩 기계로 대체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지상에 박힌 그는 영혼 없이 떠도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문득 그에게 도시를 떠도는 망령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는 시술받기를 거부하고 지상에 남았지만 그 또한 시술을 받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세상을 떠도는 사람이다. 막연한 목표가 시술을 대신했을 뿐이다. 사실 목표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 방식대로 움직이는 껍데기다. Cade가 없어지면 그는 다시금 증오할 대상을 찾아 무언가를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그리고 그다음...


그렇지만 그에게 망령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 또한 현실에 메여있는 사람이다. 시술을 받은 주제에 시술자를 망령들이라 얕잡아보고, 사람을 죽이고 테러를 일으키면서 그 죄책감을 누군가에게 전가한다. 망령의 말대로 자신이 전장의 스트레스로 인해 망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배후를 창조해 죄책감을 미루고, 있지도 않은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 아쉬워 고결한 척을 하며 숭고한 대의를 위해, 혹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싸우는 전사인 양 행동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이 치밀어 오른다. 유진은 자신이 이렇게 이중적이고 비겁한 놈이라는 것을 알까. 유진을 구했을 때 그녀가 기철의 손길을 외면하며 더러운 살인자를 보는 눈으로 바라보면 자신을 어찌해야 할까. 죽을 수 없는 육체를 가지고 인간인 것처럼 행동하는 망령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는 눈을 감으며 다짐했다. 죽자. 일이 다 끝나고 돌아가서 조용히 죽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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