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비천한 육체여. 마침내 너는 오롯이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본래의 짐승으로 돌아가려 하는구나. 한 순간의 두려움, 한 순간의 아쉬움 때문에 스러져야 할 것을 달고 살았으니 이제 나에게 그 복수를 하려는 것인가. 내가,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정신이 풍성한 아름다움과 자애로움을 맛보며 세상의 환희를 끝없이 탐닉할 때 너는 그것이 그리도 부러웠느냐. 그래서 짐승으로, 괴물로 모습을 바꾸었느냐. 정신이 쾌락을 맛보는 동안 너는 아무것도, 심지어 고통과 잠시간의 휴식조차 얻지 못했구나. 그래, 짐승이 되어 스스로를 파괴하려 함은 너의 당연한 권리다. 네가 자유로이 행함이 마땅하다. 내가 그것을 막았으니 나를 파괴하는 것 또한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무사함을 알려 나를 찾지 말고 먼저 떠나라 알려야 한다. 그는 나를 찾을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육체여. 너 또한 잘 알지 않는가. 나와 함께 그와 살을 맞대며 수백 년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던가. 부디 버텨주어야 한다. 짐승이 되었지만, 아직 그 무엇도 파괴해서는 안된다. 그에게 알려야 한다. 그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유진은 수조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시야가 흐려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그들이 붉게도, 하얗게도 보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실험을 당하는 동안 신기한 경험을 했다.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 감각이 끊어지며 몸이 떠오르는 기묘한 부유감을 느낀 것이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부유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육체마저 생생히 관찰할 수 있었다. 절대로 볼 일 없는 미지의 면을 눈으로 보는 듯한 감각은 이질적이다 못해 역겨웠다. 정수리는 창백하게 질려 털이 난 달걀 같았고 앙상하고 평평한 엉덩이는 볼품없었다. 사랑을 나눌 때마다 기철은 유진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고 예술 작품을 대하듯 그녀의 엉덩이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그는 유진의 모든 부분을 변함없이 사랑했다. 그래서 유진은 육체 모든 부분이 당연했다. 당연하게 사랑스러웠고 당연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기이한 부유감에 휩싸여 바라본 육체는 그녀가 자신의 육체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상상을 처절하게 부수었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더는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정신은 전기신호로 바뀌어 회로를 타고 어딘가로 흘러들어 갔다. 이 모든 게 그녀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다는 것만은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파괴되고 짓밟혀 마음대로 주물러진 육체를 떠나 전선을 따라 이리저리 항해하기 시작했다. 기술이나 과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어떠한 원리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뒤통수가 뻐근한 것이 아마도 머리에 박힌 기다란 막대기 때문이리라. 육체가 망가질수록 그녀의 정신은 구속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녀는 점멸하는 숫자의 벽을 지나 끝없이 펼쳐진 부호의 대로를 걸었다. 알 수 없는 언어가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유진은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걸었다. 그녀가 발을 내딛으면 숫자와 부호들이 떠올라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의 앞에 익숙한 형체가 떠올랐다. 그것은 집이었다. 컨테이너를 여러 개 겹쳐놓은 듯한 형태의 집이 그녀를 반기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유진은 그 집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집을 구하고 기철과 함께 칠했던 하얀 외벽도 알고 있었고 연갈색 문에 달린 은색 표찰도 알고 있었다. 그 집은 기철과 유진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백 년을 함께 했으며 리처드 박사와 니시무라를 초대해 함께 파티를 열기도 했다. 집 안 구조는 너무도 익숙해 눈을 감고 돌아다녀도 부딪히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집의 방 개수와 위치, 화장실의 위치, 부엌의 위치를 잘 알았고, 심지어 식기의 개수까지 알고 있었다. 집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기철과 자신의 추억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기철을 사랑하는 만큼 집도 사랑했다. 낡은 집에서 가끔 쥐 나 바퀴벌레 따위의 불청객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순간을 포함해 그녀는 그들의 집을 사랑했다. 그녀는 홀린 듯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익숙한 현관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식탁이 보였다. 니시무라와 기철, 리처드 박사가 낑낑대며 들여온 것으로 그 식탁에서 그들은 술을 마시고, 애너그램을 즐기고, 직장에 대한 험담을 했다. 유진은 주위를 맴돌며 손으로 식탁을 천천히 쓸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듣기 좋은 중저음의, 하지만 우울감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였다. 유진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다. 그래서 그녀는 놀람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수백 년간 들어왔지만 이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내 목소리를 잊은 거야? 아니면 모른 척을 하는 거야."
남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실 정도의 시간을 두고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 모두를 알 수 있어. 잊은 게 아니라 모른 척한다는 것도 알 수 있지. 내가 존재해서는 안될 망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알 수 있어. 이곳에서는 모든 게 숫자로 치환되어 인식되거든. 조금만 익숙해지면 너도 할 수 있게 될 거야. 평온한 상태는 010101010... 이런 식으로 이어지지만 마음이 복잡해지면 11011000001100000... 이런 식으로 숫자가 마구 날뛰거든."
유진은 남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서, 목소리에서, 과거 그녀가 알던 남자의 흔적을 여실히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알고 있다.
"니시무라..."
유진은 고개를 돌리며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이번 생에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존재가 눈앞에 은은한 초록빛을 내뿜으며 서있다. 그 빛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그녀가 익숙하다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이질적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경직된 유진과 다르게 제 집인 것 마냥 의자를 빼어 걸터앉았다. 유진은 두려운 와중에도 불쾌한 감정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의자는 '우리' 것이야! 기철과 함께 고르고, 함께 조립했고, 함께 앉았던 의자라고!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그의 말에 따르면 높은 확률로 그녀가 현재 느끼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니시무라는 의자의 무게중심을 뒷발에 두고 두 발을 식탁에 얹은 채 건들거렸다. 유진은 부아가 치밀어 한마디 쏘아붙히려 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에 본드가 붙은 듯한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정신과 따로 노는 육체를 재촉했지만 육체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반응이 느렸다. 회로의 한 부분이 막힌 것 같았다.
"흥분하지 마. 나는 이 공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어. 음, 공간이라고 하는 게 적합할지는 모르겠다. 일반적인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거든. 그래도 너만 괜찮다면 공간이라고 할게. 괜찮지?"
이 시점에서 유진은 이미 아무 말도, 움직임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니시무라는 자신의 전능함을 뽐내기라도 하려는 듯 손짓으로 그녀의 고개를 움직였다. 그녀의 고개는 의지와 다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손짓에 따라.
"자,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그래.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 공간에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이 공간에 대해 지금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전기적인 신호로 이루어진다는 거야. 그러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도 한 틱에 지나지 않아.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고. 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저절로 이해가 될 거야. 내가 왜 여기, 이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그리고 너희에게 닥친 불행이 왜 일어났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