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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May 15. 2024

필멸의 방정식(27)

"시연 자체는 성공적이었어. 사소한 문제들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지. 인공 근섬유 조직의 인장력을 조금 강하게 설정해서 시연 중에 물건 몇 개를 부숴버린 거 말고는 정상적으로 진행됐거든. 아, 왜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했냐는 표정이네. 별거 아니야. 시연에는 AGI를 탑재한 로봇을 사용하지 않았거든. 그냥 깡통으로 시연한 거야. 사전에 설정값을 입력한 로봇으로 일종의 연극을 한 거지. 어쩔 수 없었어. Cade 그놈들은 자기들이 만들었지만, 그 엄청난 AGI를 탑재한 로봇을 두려워하는 놈들이거든. 그리고 그놈들에게 보여주기에 살짝 미완성인 부분이 있기도 했고."

니시무라는 은은한 초록빛을 띠는 책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게 기분 나쁜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그는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컵 두 개와 모카포트를 꺼내 커피를 따랐다. 잠시 향을 맡는 시늉을 하던 니시무라는 그녀에게 커피를 권했다.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니시무라는 개의치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유진은 이 공간이 구현하는 그래픽에 조금 놀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어. 시연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이제 출시만 앞두고 있어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한 거야. 아니, 필연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건 필연이었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반드시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지."


니시무라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세계를 지배하는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법칙은 인과의 법칙이다. 전혀 상관없는 전후관계의 사건들일지라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무형의 힘으로 인해 연결되어 있다. 한 남자의 하루를 예로 들어보자. 남자는 주말과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그는 1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양치와 세안을 한 후 사과 하나를 들고 매일 같은 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매일 같은 정류장에 내린다. 이후 회사 앞 흡연장에서 담배를 한대 태운 후 출근한다. 이것이 남자의 아침 일과다. 하지만 그날 아침은 달랐다. 그날따라 휴대폰 알람이 울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양치와 세안을 완료한 시간이 2분가량 늦어졌다. 남자는 급하게 사과를 챙겨 집 밖으로 나서려 했지만 마음에 드는 싱싱한 사과가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기에 남자는 아침을 포기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간다. 보통 버스는 도착 예정시간보다 1~3분 정도 늦기에 평소라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날따라 버스는 정시에 도착했고 그는 숨을 헐떡이며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출근은 해야 했기에 남자는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생활이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기에 남자는 출근 시간을 고려해 뛰어갈 수 있을만한 곳에서 내리기로 결심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급하게 뛰어 회사 앞에 도착하니 출근 시간까지 3분 남아있다. 지금 담배를 태우지 않으면 점심시간까지 담배를 피울 시간이 없기에 그는 호흡을 고르지도 않고 담배를 물었다. 짙은 연기가 단숨에 폐로 들이닥치며 그는 거센 기침을 내뱉는다. 그런데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와중에 기침은 멈출 기색이 없다. 주변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그저 학습된 윤리적 명령과 현실적인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남자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용기를 낸 누군가 다가갔을 때 그는 이미 싸늘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 모든 게 단지 알람이 울리지 않아서 벌어진 한 남자의 비극적인 불운이라 생각할 것이다. 세상의 법칙에 대해 조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남자가 그날 경험한 무수한 불운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일괄적이지 않은 버스 도착 시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흡연 시간도 보장하지 않는 불합리한 회사의 업무 강도에 대해 불만을 표할 것이다. 첫 번째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이고, 두 번째는 정치인 혹은 경영가의 시각이다. 이 두 시각이 잘못됐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운'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굉장히 강력한 힘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운'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혹은 인식하지 않고 있는 인과의 총체이다.

하나 이를 '운'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 큰 장애를 초래한다. 이 지점에서 보면 정치인이나 경영가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법칙을 조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르게 우리 주변을 흐르는 전기적인 신호의 총체를 약간이나마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에 대해 본질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운'은 흔히 우연의 영역이라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운'은 명확한 신호이며 한 인간이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경험한 인과의 총체이다.


남자의 하루를 찬찬히 살펴보자. 먼저 남자는 분명히 핸드폰을 충전시켜 놓았지만, 어째서인지 충전이 되어있지 않아 방전되었고, 그로 인해 알람이 울리지 않아 늦잠을 잤다. 늦잠을 잤기 때문에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마음에 드는 사과를 고르느라 시간이 추가로 지체되었다. 남자는 급하게 뛰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지만 버스를 놓쳤고, 택시를 잡았지만 돈을 아끼기 위해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렸다. 미친 듯이 달려간 남자는 흡연을 그 시간에 '반드시' 해야 했으므로 흡연을 했고, 호흡이 무너져 기침을 하다 가래와 피가 기도를 막아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할 당시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 시간을 어제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남자는 분명 충전기가 제대로 연결된 것을 확인하고 잠에 들었다. 문제는 그가 자고 있을 때 발생했다. 남자가 살고 있는 지역은 사고와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었고, 그로 인해 정전이 자주 발생했다. 그날도 그랬다. 음주운전 차량이 인근 변전기를 들이박았고, 남자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에 정전이 발생했다. 남자는 자느라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 지역은 우범지역이었기에 밤에는 경찰이나 소방관이 출동하기를 꺼려했고, 정전은 아침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남자가 늦잠을 자서 급하게 준비한 이후 사과를 꺼내려 열었던 냉장고도 정전의 여파로 음식물이 밤새 신선도를 잃었다. 원인은 몰랐지만 남자가 원하는 사과를 고르지 못했던 이유도 정전에 있었다.


자, 우리는 남자가 늦잠을 잔 이유와 신선한 사과를 고르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남자의 '불운'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남자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였고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있었다. 남자를 뱃속에 두고도 어머니는 담배와 마약을 달고 살았고 이는 남자가 가진 선천적인 폐 질환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부모가 으레 그렇듯 그들은 남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남자는 만성적인 폐 질환을 달고 살게 되었다. 현재 남자가 살고 있는 지역에 살던 남자의 부모는 길거리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객사했고 남자는 먹고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어린 나이부터 일터에 나간 남자는 보호받지 못한 환경에서 담배, 술, 마약을 배웠고 이는 그의 폐 질환을 악화시켰다. 성인이 되었을 때, 그의 폐는 이미 망가져 더 이상 달리는 것조차 힘든 몸이 되었다.


그런 남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녀의 이름은 '렁 마이어스'. 철자는 다르지만 폐를 뜻하는 영어 단어와 발음이 같다는 것은 우연이었다. 아니, 사실 우연도 아닌 것이 그녀 또한 선천적인 폐 질환을 앓고 있었고, 딸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미권 국가에 살았던 남자는 '렁'의 이름을 듣고 운명을 느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닌 것이, 남자 또한 폐가 좋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해당 단어에 대한 동경과 결핍이 있었다. '렁'은 남자가 들어가게 된 직장의 인사부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남자와는 다르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여자였다. 남자는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마약과 술을 끊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에 '사과' 하나를 먹기 시작했다. 5년이 지났을 때, 남자는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습관이 생겼고 이전보다 건강한 모습을 가질 수 있었으며 비록 인턴이기는 하지만 다니던 직장의 사무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담배는 끊지 못했다.


이 정도면 남자의 '불운'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다. 어째서 버스기사는 평소와 다르게 일찍 도착했으며, 남자는 왜 담배를 끊지 못한 것일까. 또한 왜 남자의 직장은 업무 강도가 그리도 높은 것이며 남자가 죽어갈 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은 것일까. 버스기사의 이야기부터 해보자면, 사실 그는 아침에 시답잖은 일로 부부싸움을 하느라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중간중간 과속을 했고, 사고는 없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도착 예정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것이다. 남자가 담배를 끊지 못한 이유와 직장의 업무 강도는 상관관계에 있다. 남자의 직장은 방산업체의 하청업체로 철근 따위를 가공해 납품하는 일을 했다. 남자의 나라는 인근 국가와 종교 및 경제적인 이유로 분쟁을 일삼았지만, 최근 인근 국가들이 일제히 군비를 확장하며 남자의 나라 또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남자의 직장은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모든 사원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남자에게는 별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이 없었기에 출근 시간 전, 그리고 퇴근 이후 피는 담배가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남자가 죽어갈 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은 이유도 늘어난 업무로 인해 모두가 지쳐있어 상황 판단이 느려졌으며 전쟁의 위기가 고조됨으로 인해 사회의 긴장감이 팽팽해진 탓이다.


니시무라는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라 했다. 자신이 이 연구를 시작한 것, 시연 이후 긴장이 풀린 것, 기철과 리처드 박사를 만난 것,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과거들의 총체가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말했다.


"물론 복잡하고 지난한 인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있지. 그 사건들에도 결정적인 인과가 있고. 내 경우에는 그 인과의 중심에는 기철이 있어. 리처드 박사나 너나 기철로 인해 형성된 부수적인 인과야. 아아... 이 모습이 되고서야 비로소 운의 본질을 깨달았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니시무라는 커피를 마시며 황홀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여전히 커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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