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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Jun 08. 2024

필멸의 방정식(29)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떤 계기나 징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말리아에 와서 유진을 잃고나서부터, 어쩌면 리처드 박사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그것도 아니라면 니시무라가 죽고 나서부터 깊은 곳에 숨어 나약한 틈을 노리던 것이 전장의 스트레스를 타고 흘러넘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명백한 상실로 인한 공포와는 다르다. 그런 종류의 공포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동반한다. Cade든, 이 세상이든, 혹은 자기 자신이든 복수할 대상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기에 명백한 방향성을 가진채 타오른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불안감은 분노와 전혀 상관없는 감정이다.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지 않고 텅 비워버리는 듯한 공허함이 찾아왔다. 기철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원인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이 감정이 들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철은 당황했다. 심장 부근 전체가 청 비어버린 것처럼 몸에 힘이 빠지고 다음 행동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정신 차려. 이 머저리야!"


망령이 그를 부른다. 왜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지? 왜 나를 머저리라 부르는 거지? 기철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선이 닿는 곳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바위 뒤에 숨어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망령이 보였다. 그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바위 너머로 총을 들어 난사하고 있었다. 터지는 폭발의 빛이 그의 강철 손에 반사되어 눈으로 쇄도했다. 기철은 그제야 망령이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기철은 그깟 총알을 쏴대는 일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변화가 더욱 중요했다.


"뭐 하는 거야. 병신 같은 놈이!"


안개가 낀 듯한 정신 상태와는 별개로 그의 적나라한 욕설은 너무나 선명하게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기철은 더 이상 이 전장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명백한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그는 확신했다. 그는 망령과 함께 전투를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기철은 총을 내려놓고 온몸에 두른 탄과 폭탄을 하나하나 끌렀다. 총과 폭탄이 바닥에 떨어지며 나직하게 절그럭- 하는 소리를 냈다. 망령은 그런 기철에게 욕하기를 그만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 또한 방금까지의 기철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기철은 그를 마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망령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총알이 기철을 향해 비 오듯 쏟아졌다. 어깨가 스쳤고 팔에 구멍이 뚫렸다. 다행히도 머리는 맞지 않았다. 망령은 그에게 날듯이 달려들어 그를 바닥에 눕히고 흉악한 강철 팔로 얼굴을 후려쳤다. 어금니 몇 개가 부러지는 게 느껴졌다.


"미친 거냐."


망령이 물었지만 기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이 느려진 세계에서 자신의 변화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아아, 그래. 살아있는 게 이상하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Cade 놈들에게 잡히면 실험체가 되는 것밖에 더하겠어? 법이 보호해 주는 곳이라면 모를까, 여기는 대놓고 Cade가 실험실로 이용하는 곳이잖아. 그래. 죽는 게 나아. 그녀라면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질 거야. 나보다 강한 여자지만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있으니 육체와 정신이 한꺼번에 유린당하는 경험을 하고 버틸 수 있을 리 없어. 기철은 자신 위에 올라타 다시 한번 팔을 들어 올리는 망령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끝났어요."


"뭐?"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만둘게요."


망령은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기철을 보았다. 실제로 그는 어느 정도 미쳐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경험한 상실, 이곳에 와서 경험한 상실, 전장의 스트레스와 더불어 누군가 유도한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이 불쾌한 감각까지, 기철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수백 년간 경험한 사람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망령을 밀어내고 바위에 등을 대며 주저앉았다.


"그만둔다고요. 못 들었어요? 이제 끝이라고. 그리고 반말하지 마, 나이도 어린 게. 나보다 힘들게 살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너보다 덜 치열하게 살았다는 건 아니야. 나도 내가 살아온 세월만큼 고통받으며 살았어. 알아? 하긴 너처럼 무식한 놈이 뭘 알겠냐."


기철은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막 유진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가진 채 찾아왔다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오늘 기철과 망령은 거대한 안테나 수십 개가 들어선 Cade의 데이터 송수신 센터를 습격했다. 새벽에 시작된 습격은 예상외로 완강한 저항을 통해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이제 단 둘로 이루어진 팀이 아니었다. 반란군이 그들을 도왔고 지역민으로 이루어진 민병대도 그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유진이 죽었고 그녀가 죽으며 남긴 사념이 안테나를 타고 이곳에 흘렀으며 마침 폭파된 안테나 하나로 인해 그 사념이 기철에게 닿았다는 것이다. 기철도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들었다. 그 메시지는 귓가를 넘어 머릿속에 바로 들어왔고 곧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나는 곧 사라질 거야. 니시무라는 살아있어. 다른 형태로. 나와 함께.'


망령은 얼빠진 기철을 보고 혀를 차며 그가 내려놓은 무기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몸을 숙여 자리를 떴다. 기철은 그가 떠나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일대의 움직임 전체가 느껴졌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니,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 이상한 것이 되었다. 유진의 메시지를 받은 이후 그는 자신의 주변을 흐르는 미묘한 전류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헤엄치는 듯한 감각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저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몸이 다른 소통방식에 적응했다,라는 정도가 이해의 전부였다. 아마 사망률 연장 시술을 받으며 유전자에 변화가 생겼고 그로 인해 변이가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유진이 죽었다. 니시무라가 살아있는 게 어쨌다는 말인가. 유진이 죽었다. 다른 형태가 되었다는 게 어쨌다는 말인가. 유진이 죽었다. 사고의 진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유진은 사라졌고, 니시무라와 다른 형태로 살아있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유진이 아니다. 이 새로운 능력으로 그녀와 소통할 수 있더라도 그는 더 이상 유진을 끌어안을 수 없고 그녀와 함께 잠에 들 수 없다.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수도, 그녀가 그려내는 마법 같은 그림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유진은 이제 없다. 기철은 몸을 일으켜 전투가 한창인 시설과 반대로 걸어갔다. 그를 향해 총알이 날아왔지만 어느 하나 닿지 않았다. 기철은 눈앞을 지나가는 총알에도, 발 밑에서 튀어 오르는 자갈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었다. 망령이 그를 힐끔 돌아보았지만 기철은 어느새 그의 시야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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