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나는 브런치북 '나의 이혼을 알립니다.'를 연재 중이었다.
오프라인에서는 차마 힘든 이밍아웃을 온라인으로 연습한다는 명목 하에, 전남편을 신랄하게 까고 있었다.
인정.
이렇게 온라인에서는 술술술 잘 나오는 이밍아웃이 오프라인에서는 어째서 힘든 것일까?
아무래도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에서는 나와 동글이가 직접 얼굴을 아는,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내게 '이혼녀' 프레임을 씌우는 건 상관없는데, 동글이에 대해 '한부모 가정 아이'프레임을 씌워 손가락질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으니.
(이 프레임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부정적 프레임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인정하자.)
우리는 사회적 인간이기에 이런 '사회적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으니.
이 '사회적 시선'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혼이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일 테고, 또 우리 사회는 '같음' 상태를 추구하며, '다름' 상태를 인정하는 것을 힘들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흔치 않은 '이혼'에 대해 누군가 이밍아웃을 하면 '다름'을 인정하고 "아 그렇구나."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가 도대체가 없는 것이다.
이혼을 한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 땅에 나를 포함한 이혼녀들은 이토록 움츠러들어있는지 생각하는 요즘이다.
옛날보다 이혼이 많아졌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던 와중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를 읽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구절이 있어 형광펜으로 주욱 밑줄을 긋고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중 사실 내가 이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누군가 이밍아웃을 했다면 나도 "아.. 어쩌다..?", "아니 요즘 이혼이 흠도 아닌데 뭐." , "똥차 가고 벤츠온대잖아~", "잘했어. 그 자식은 애초에 글러먹었어!" 등등 당황한 얼굴로 별 시답잖은 말들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처럼 당황하여 헛소리를 늘어놓지 않도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결혼식 예절, 장례식 예절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 이밍아웃을 했을 때의 예절'정도로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중요한 건
결혼식에서도, 장례식에서도, 이밍아웃에 대해서도
그 예절이라 함은 '진심'을 기본으로 하니,
모두 진심으로 축하하고, 위로하고, 대응하기를!
나의 현실판 이밍아웃에서 내가 이들의 진심을 느꼈듯이 말이다.
첫 번째 이밍아웃 - K언니(동글이 친구 엄마, 동네 언니, 요즘 내 베프)
K언니에게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던 때가 딱 1년 전 이맘때였다.
전남편의 세 번째 외도를 알게 된 후, 내 마음속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동글이를 위해 나의 답에 재고에 재고를 더하던 때였다.
밤늦게 K언니를 만나 얘기했다.
"언니, 동글이 아빠가 이혼하자고 해요."
"응?? 왜요??"
나는 그간의 일들을 짧게 압축하여 K언니에게 얘기했고, K언니는 나대신 눈물을 흘렸고 나 대신 전남편 욕을 시원스레 퍼부어주었다.
K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 모든 것을 안고 갈 만큼 사랑하는지.
내 마음속 답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다 안고 갈 만큼 전남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고, 아이를 위해서 그저 같은 집에 살고만 있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이혼을 요구한 것은 전남편이고, 세 번째 외도가 있고, 그런 상황에서 전남편의 마음을 상간녀가 아닌 내쪽으로 끌어올 의지가 내게 없었던 것이다.
K언니는 이후에도 전남편과 나 사이의 여러 이슈들마다 나 대신 화를 내주었다.
"동글이 엄마, 왜 남의 일처럼 얘기해요? 그리고 왜 그렇게 동글이 아빠가 말해주지 않는 서사를 혼자 써 내려가요? 물어봐요. 직접 말하게 해요. 왜 이혼하자고 하는지, 도대체 왜 동글이를 안 보려고 하는지, 왜 그러는지! 나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동글이 엄마 혼자 그 모든 짐을 다 지려하는 게. 결혼을 둘이 했으면 이혼도 둘이 해야지, 그 자식은 왜 혼자 빠져나가고, 동글이 엄마 혼자 고민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게 만들어요?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앞으로 하지 마요! 이해하려고 하는 거.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냉장고예요. 냉장고는 냉장고일 뿐이지, 우리가 냉장고를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그런 언니의 말에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K언니는 얘기한다.
동글이도, 동글이 엄마도 예전보다 지금 훨씬 편해 보인다고.
첫 번째 이밍아웃을 하며 마음이 어땠더라..
K언니가 내게 '이혼녀'프레임을 씌우고 나를 볼까 봐 두려웠을까?
우리 동글이를 '한부모가정 아이'라며 손가락질할까 봐 겁났을까?
아니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밍아웃을 했고, 나 대신 화를 내주고, 나 대신 울어준 언니에게 고마웠다.
진심.
K언니는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나를 걱정해 주었다.
두 번째 이밍아웃 - E언니 (동글이 친구 엄마, 동네 언니)
K언니와도 절친한 사이인 E언니에게는 함께 여행을 가게 되어 이밍아웃을 하게 되었다.
K언니, E언니의 가족들과 함께 동글이와 나는 지난겨울 스키장에 다녀왔다.
동글이 아빠가 여행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말해야 했다.
내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어떤 핑계를 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소중한 내 사람들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막은 얘기할 시간이 없어 결론만 얘기하긴 했지만, E언니는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세상에.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이.
E언니의 이 고맙다는 말은 '이밍아웃을 해 줄 만큼 나를 신뢰해 줘서 고마워.'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두 번째 이밍아웃을 하며 마음이 어땠더라..
E언니가 내게 '이혼녀'프레임을 씌우고 나를 볼까 봐 두려웠을까?
우리 동글이를 '한부모가정 아이'라며 손가락질할까 봐 겁났을까?
아니었다.
역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밍아웃을 했고, E언니의 고맙다는 말이 되려 고마웠다.
진심.
E언니의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었고, 이후에도 E언니는 이런 상황들을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었다.
세 번째 이밍아웃 - 급여 담당자
이 세 번째 이밍아웃이 정말 웃픈데..
연말정산 시즌이었다.
전남편으로 인한 가족수당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어, 가족 삭제 신청을 해 둔 상태였고, 급여 담당자분께 연말정산 자료와 함께 가족수당에 대한 증빙서류를 제출했다.
서류를 검토하던 급여 담당자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친정아빠의 암진단에 의한 장애인증명서(소득공제용-암진단은 장애등급이 나오지는 않지만 연말정산 시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를 보시고, 곧이어 혼인관계 증명서를 보시더니, 전후 관계가 대충 파악이 되셨나 보다.
"확인 끝났습니다. 가보셔도 좋아요."라고 서둘러 말씀하시는 떨리는 목소리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붉어진 눈시울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나는 당신을 연민하고 있습니다."였다.
나에게는 '이혼'이 이미 다 끝난 일이었고 더 이상 그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고, 다만 '아이 아빠가 아이를 보러 왔으면 좋겠다.'라고 소망하던 시기였다.
아빠의 건강에 대해서도 늘 걱정하지만 '수술 후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하루하루 감사하자.'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연말정산 최종 금액을 보니 부양가족도 늘었고, 돈도 많이 썼고, 게다가 한부모 공제에 부양가족의 장애 공제까지 받아 세금을 돌려받게 되어 신이 나 해맑게 급여 담당자에게 내려간 길이었다.
아.
급여담당자의 그 표정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웃픈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진심.
이 급여 담당자는 어쩌면 극F이실지도, 어쩌면 비슷한 일이 주변에 있으셨을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내게 진심으로 감정이입하였고 그 감정이입이 내게 웃픈 위로가 되었다.
네 번째 이밍아웃 - 동글이의 담임 선생님
학기 초가 되면 상담을 한다.
올해 상담 신청을 한 이유는 명확했다. 아이의 현재 상태를 담임 선생님께 알려야 한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행하는 수업에서 여러 가정의 모습이 있음을 아이들이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동글이가 주눅 들지 않았으면 했다.
담임 선생님은 먼저 동글이의 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셨다.
평일에는 주로 무엇을 하냐, 주말에는 무엇을 하냐..
주말에 가족들과 주로 시간을 보낸다 했을 때, 물어보셨다. 아이와 아빠의 관계는 어떠한지.
동글이가 얘기한 적이 있다. 수업에서 '가족 칭찬하기'를 했는데, 동글이는 '최근의 아빠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엄마 칭찬만 했다'라고. 가족에게 주는 상장도 '아침을 차려주시는 부지런한 할머니께'드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물어보셨을 것이다.
"사실은 작년에 아이 아빠와 이혼을 했고, 지금은 사정이 생겨서 아빠를 못 만난 지 꽤 되었어요."
이밍아웃을 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이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그리고 내가 선생님께 여쭈었다.
혹시 교실 내에서 동글이가 변한 것은 없는지, 티가 나지는 않았는지.
내가 '티가 난다'라고 표현한 것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으나, 담임 선생님은 '아빠 없는 티가 난다.'로 오해하신 듯,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고 하시며, 사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한부모 가정의 경우에는 그런 사실을 선생님께 잘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빠들은 상담을 하며 '아이 엄마가 없어서...'라고 운을 떼는 경우도 있지만,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한부모 가정의 경우에는 한부모 가정의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경우가 없다고 했다. 내가 처음이라며.
"아, 그렇군요. 제가 오늘 집에 가서 이불킥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오호호호호"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동글이에게 혹시라도 작은 변화가 생기거나 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실제로 집에 가서 이불킥을 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학기 초 학부모 상담을 하며, 이밍아웃을 한 분이 딱 한 분 계셨는데, 아버지셨다.
분명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 함께 상담을 하셨는데, 어머니께서 먼저 나가시고 아버지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며 말씀하신 내용이었다. 같이 오신 분은 학생의 새엄마이고, 학생이랑 친엄마는 한 달에 한 번 만나고 있다고, 아이에 대해 연락하실 일이 생기면 아이 엄마(친엄마든 새엄마든)가 아닌 아빠인 본인에게 해 달라고.
나는 다 큰 학생들이라 학부모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학생 상담을 하며 한부모 가정인지 알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학부모가 상담 시 그런 일을 얘기한 적은 없었다. 초딩이는 학부모 상담 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안 해도 되는 거였다면, 잘 지내고 있는 거였다면, 그냥 이밍아웃, 안 할 걸 그랬다.
그래도 이왕 한 거, 그냥 믿기로 했다.
동글이가 난처한 상황에 있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앎으로 인해 자연스레, 융통성 있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진심.
동글이 담임 선생님의 '조금 더 살펴보겠다'는 말은 동종업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렇게를 제외하고는 이밍아웃을 한 적이 없다.
친정엄마를 통해 들은 친척들 외에는. 나의 이혼을,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작년 3월 초, 정말로 이혼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때, 동글이 학교 엄마들이, 내 직장 동료들이 가족들 안부를 물어와 '어쩌다 보니 주말부부'라고 했었다.
그들이 다시금 물어오면 솔직할 수 있을까?
아직 이밍아웃이 힘들다.
이 동네, 이 바닥, 좁디좁다.
그래서 다들 이사를 하고, 전학을 가나보다.
아무도 모르는 동네에서 새롭게 시작하는가 보다.
새로운 곳에 가서는 어쩌면 "제가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에요."라고 솔직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나 이사를 갈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
그냥 이렇게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러니까,
지금까지 맺어온 관계에서는 정말 믿는 사람에게 이밍아웃을 하거나, 정말 필요에 의한 이밍아웃만 가능하다는 것이 이밍아웃에 대한 나의 결론이다.
어렵다.
언제쯤 '사회적으로 맺어온 관계'들에게 솔직할 수 있을까.
(선배 싱글맘님들, 언제쯤 되셨나요?)
그리고, 다섯 번째 현실판 이밍아웃을 이 글을 전함으로써 하려 한다.
내 가장 아끼는 지인에게.
언니, 결국, 이혼했다.
언니, 전보다, 행복해.
굳이 누가 물어오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말하지 않으면 뭔가 숨기는 것 같아 불편한.
그것은 이밍아웃.
참, 그런데 누군가 내게 이밍아웃을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진심을 담아,
"앗! 저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