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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May 24. 2024

잔인한 5월의 대설특보

feat.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바야흐로 5월이다.

글을 쓰는 시점인 지금(5월 16일)의 날씨는 절대 5월이 아니지만.

어제부터 내린 비에 강풍까지 더해져,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급기야 입김이 나왔다.

입김이 문제랴.

현재 강원 산간 지역은 대설 특보가 내려져 곳곳에 눈이 쌓여 있는데.

어제 뉴스를 보며 동글이가 말했다.

"에엥?? 대박!! 지금 5월인데 눈이 온다고??"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세상에.

한(恨)을 품은 여자가 오죽이나 많으면 5월에 이렇게 춥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린단 말인가.

그 여자들의 한(恨)에 나의 한(恨)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듯하다.

강원 산간 봄나물 경작에 해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한(恨)의 한자가 맞는지 확인하다가 문득 뜻을 보았다.


한(恨) :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걷기로 마음먹고, 오늘 출근길도 어김없이 걸었다.

비가 갠 후 청명한 파란 하늘을 보며 걷는데, 아파트 담장 사이에 빼꼼 고개를 내민 장미를 보았다.

며칠 전부터 "장미가 피었네?!"하고 지나갔지만, 오늘 아침은 뭔가 다른 느낌이다.

입김이 나올 만큼 추운 날씨에, 활짝 피어있는 장미라니.

지난겨울 철 모르고 핀 철쭉처럼, 역설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풍경에 가슴이 설렜다.

이 느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잔인한 5월의 반이 흘러갔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초보 싱글맘에겐 가슴 시린 날들이 대거 출동하는 5월 잔인하다.

재작년과는 사뭇 달랐던 작년의 5월, 그리고 작년과는  다른 올해의 5월이었다.

그나마도 다행인 건, 어린이날 전날 동글이가 6개월 만에 드디어 아빠를 만났다는 것이다.

무려 6개월 만에 성사된 면접교섭이었다.

(보통은 비양육자가 아이를 보기를 원하고, 양육자는 아이가 혼란스러워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던데, 전남편과 나는 반대였다.)


동글이가 아빠를 만나러 가기 전, 나는 동글이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오라고 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고, 안기고 싶으면 많이 안기라고 했다.

아빠를 만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아빠에게 안겨있기'였던 동글이다.

아빠를 만난다는 반가움과 이제야 만난다는 서러움과 아빠를 향한 사랑과 여러 감정이 교차해 아빠 만나기 10분 전부터 울먹이며 내 품에 안겨 있다가, 차에서 내리는 아빠를 보고는 울음을 꾹 눌러 참 애써 웃음을 짓는 동글이를 보았다.

내 아이의 그 오묘한 표정에 울컥,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이 고인 눈에 웃음을 띠며, "재밌게 놀다 와!"하고 씩씩하게 인사했고, 동글이도"응!"하고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정아빠와 친정엄마가 맨발 걷기를 가셔서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들어와서도 동글이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어, 마음이 내내 먹먹했다.


5월 초에 보기로 약속했던 그날의 아빠와의 통화 끝에도 동글이가 그런 표정이었을 거란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시렸다.

회식이 있어 조금 늦던 날, 동글이는 아빠와 통화를 했다며 울면서 전화를 했다.

"엄마, 아빠랑 통화를 했는데, 엄마한테 안기고 싶은데, 엄마가 지금 집에 없어서, 전화했어.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 중이고, 할아버지가 깨어 있어서 할머니한테 못 가겠어."

(아직 동글이의 할아버지는 전남편과 나의 이혼을 모르고 계신다. 그 사실을 동글이도 알고, 할아버지 앞에서는 아빠 이야기를 조심하는 편이다.)

"아빠랑 통화하고 아빠 보고 싶어서 울었구나. 엄마가 동글이 안아주고 싶은데, 엄마가 동글이 옆에 없네.. 그럼, 엄마가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방에 가서 동글이 안아달라고 얘기해 줄까?"

"응, 그러면 좋겠어."

그날 회식이 끝나고 서둘러 돌아왔을 때, 동글이는 할머니와 웃으며 맛있게 갈비를 뜯고 있었다.

세상 제일 귀여운 나의 동글이.

자기 전에 아빠랑 통화하며 무슨 얘길 했는지 조잘조잘 얘기하다 다시 울먹였다.

아빠가 사랑한다고 말해줬다고, 근데 눈물이 날 거 같아서, 울면 아빠가 걱정하니까 "끊어~" 하고 급하게 끊었단다.

아빠에게 오랜만에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서 행복하다고 하며 동글이는 울면서 웃는 오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동글이가 제 아빠를 만나러 가고, 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동글이의 그 오묘한 표정을 떠올리자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기도 했고, 무척이나 맛있는 걸 먹고 싶기도 했다.

무엇이든 먹어야 기운이 날 것 같아, 집 앞 슈퍼에 내려가 배홍동 비빔면을 사서, 야무지게 오이까지 채 썰어 먹었다.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웰치스 탄산을 사 와서 말이다. 마치 맥주라도 되는 냥 벌컥벌컥 들이켰다.


유튜브를 틀어 노래를 들으며, 글을 썼다. 끝맺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말이다.


동글이는 아빠와 무얼 하고 있을까,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까, 하고 싶은 밀린 이야기들을 했을까, 아빠 보여주고 싶다고 수업 시간에 만든 여러 작품들을 사진 찍어 갔고 아빠가 있을 땐 없었던 동글이만의 책상을 자랑하겠다고 사진 찍어 갔는데 아빠에게 보여줬을까, 계속 안겨 있고 싶다고 했는데 충분할까...


그러고 보니, 동글이와 아빠만 면접 교섭을 한 건 이번이 두 번째이다.

작년 11월에 친정엄마께서 볼 일이 있으셔서 친정아빠 식사를 내가 챙겨드려야 했다.

그래서 동글이만 제 아빠를 보고 왔는데, 그때랑은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전남편에게 새 가정이 생겼고, 아마도(나의 추측일 뿐이니) 그로 인해 무려 6개월 동안 전남편은 동글이를 만나는 것을 회피해 왔던 탓인 듯하다.


6개월 만에 만나는 아빠에 대해 동글이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1시쯤 만나 4시가 조금 넘어서 동글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20분쯤 뒤에 집에 도착한다고.


아파트 로비에서 내려 아빠와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난 동글이는 나를 와락 안고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방에 들어와 마치 방금 아빠를 잃어버린 아이 인 양 아빠를 목놓아 외치며 울었다.

아빠를 수없이 외쳤다.

그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몸부림을 치며 우는 동글이를 그저 바라보고, 안기면 안아주고, 다시 침대를 치며 우는 모습을 보며 함께 울 수밖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동글이는, 가슴이 먹먹하다 했다.

아빠는 우리 가족인데, 더 이상 가족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주말에 함께 외출해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그 일상이 오지 않을 것이라서 먹먹하다고 했다.

열 살이다.

고작 열 살 아이의 입에서 먹먹하다는 단어가 이렇게 구체적인 이유들로 표현되었다.

전남편과 나는 열 살 동글이 앞에서 그리하여 평생 죄인일 수밖에 없다.


나는 동글이에게 맛있는 초콜릿을 먹자고 했다.

언젠가부터 동글이와 나의 아주 작은 기분 전환 방법이 되었다.

달콤한 초콜릿은.

동글이는 자신의 간식 창고에서 초콜릿을 꺼내 와 함께 울었던 내게 작은 초콜릿을 건넸다.

이 작은 천사는 그리하여 평생 내게 세상 가장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동글이는 초콜릿을 입에 물고 아빠를 만나고 와서 아빠 얼굴이, 아빠 목소리가, 아빠 냄새가 생생하다 했다.

나는 동글이에게 아빠를 만난 지 오래되어 기억이 안 난다고 했을 때 엄마가 너무 속상했는데, 오늘은 생생해서 다행이다, 눈 감고 아빠를 떠올리고 느껴보자 했다.

동글이는 눈을 감고 아빠를 안아보는 시늉을 했다.

"엄마는 이만큼만 팔을 벌리면 안아지는데, 아빠는 이마안~~큼 벌려야 안아져."하면서 우는 듯 웃었다.


자기 전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동글이는 내 팔을 꼬옥 끌어안고 말했다.

"엄마가 든든해. 의지가 돼. 엄마는 내 버팀목이야."

다행이다.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엄마여서.

응, 엄마는 동글이의 버팀목이야. 언제든 힘들 때는 와서 기대면 버팀목이 되어 너를 단단하게 지켜줄게.


5월은 이혼가정에, 싱글맘, 싱글 대디에게, 잔인한 달이다.

어린이집이나 초등 저학년에서는 '가정의 달'이라는 명목 하에 '아빠, 엄마에게 감사 편지 쓰기', '가족 사진 가져오기' 등등의 활동을 한다.

편견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교육 현장에서도 많은 노력 중인 것을, 나 역시 교육 현장에 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런 활동을 하며 은연중에 아이들은 우리 가정의 다른 모습을 인식하게 된다.

다른 모습이 틀린 모습은 아니지만, 그 다름을 아이들이 인정하고 아파하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 역시 아프고 찢어진다.

이런 아픔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절대 익숙해질 수 없다.

다만 해가 거듭될수록 인정하고 아파하는 방식이 조금씩 성숙해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있다.


잔인한 5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발행일 기준)

게다가 이번 5월 8일 어버이날 시댁에 방문해야 하는데 일정이 어떻고, 시어머니께서 이런 것들을 원하시고 등등의 아줌마들의 시댁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미 이밍아웃을 한 동네언니들에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혼해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지만, 시댁 신경 쓸 일이 없어졌다는 건, 홀가분한 일이네요!"

(나는 시댁을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으니 엄청나게 홀가분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혼의 또 다른 장점까지 발견했다.


그러니, 또 살아보자!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매화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봄꽃 중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목련의 꽃말은 고결함이다.


계절의 여왕 5월에 피는 빨간 장미는 통상 열정을 상징한다.

그런데 입김 속에서 오늘(5월 16일) 내가 본 장미는

"와 신나!! 봄이라구! 내 세상이야!!" 했다가

"이럴 수가, 세상 일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네. 갑자기 이렇게 날이 추워질 줄 누가 알았겠어??"

하고 움츠렸지만, 그래도 고개를 떨구지 않고 당당히 내민

내 모습 같아서.

그리하여 가슴이 설레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feat.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왜 내버려 두지를 못해
그냥 가던 길 좀 가
어렵게 나왔잖아
악착같이 살잖아 hey
나는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삭막한 이 도시가 아름답게 물들 때까지
고갤 들고 버틸게 끝까지
모두가 내 향길 맡고 취해 웃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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