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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웅 Nov 24. 2024

숫자의 위력 (연재 2화)

과거시험

첫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던 박율은 뼈대도 보통 뼈대가 아닌 용가리 통뼈 양반 집안 출신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문과 시험이 아닌 수학과 계산을 맡은 산원(算員)이 되고 싶어 하급 기술관 시험을 치려고 역과·의과·음양과·율과로 이루어진 잡과에 몰래 응시하려다가 부친과 동문수학을 했던 참시관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을 맞았다. 치도곤을 맞았다고 해서 진짜로 곤장을 맞은 건 아니고 양 싸대기를 왕복으로 후려 맞아 쌍코피가 났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박율은 재응시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박율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과거 시험의 책문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댓구와 대칭이 이루어진 시어로 표현하시오>               


언뜻 쉬운 문제 같아 보이지만 성리학 공부에만 매달린 유생들에게는 손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제시문이었다. 정철의 속미인곡이 임금에 대한 충정을 노래했다는 식의 해석에만 매달려 공부하던 일반적인 유생들과 달리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쓴 정철이 글에서 엿보이는 진심과 내용으로 미루어 동성애자가 분명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쳐서 훈장 선생님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날리도록 두들겨 맞았던 박율에게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손쉬운 문제였다.               


대칭이라면 자신 있었던 박율은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후 양손을 탁탁 털어 대며 제일 먼저 답안지를 내고 과거 시험장을 나설 수 있었다.               


음주와 가무를 즐기며 창민요(唱民謠)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박율은 "산천초목 속잎이 난듸 구경가기 얼화 반갑도다."라는 첫 구절에 영감을 받아 대칭 형태의 한시로 표현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에 식은 죽을 후식으로 들이키는 것보다 쉬웠다.               


과거 시험 책문에 대한 박율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山川草木(산천초목)     

川山木草(천산목초)               

日月明星(일월명성)     

月日星明(월일성명)               

雨雲風雷(우운풍뇌)     

雲雨雷風(운우뇌풍)               


자연에 대한 도입부 벌스(Verse)로 몸을 푼 후 본격적인 칠언절구로 작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山峰高揚於碧空(산봉고양어벽공)     

碧空於高揚山峰(벽공어고양산봉)               


花開香氣滿四方(화개향기만사방)     

四方滿香氣花開(사방만향기화개)               


浪濤撫慰大海心(낭도무위대해심)     

大海心撫慰浪濤(대해심무위낭도)               


自然之美充滿胸(자연지미충만흉)     

胸充滿之美自然(흉충만지미자연)               


푸른 하늘에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고,     

높은 산봉우리 너머로 하늘은 파랗다.               


꽃이 피고 그 향기가 사방에 가득하니     

향기로운 꽃이 곳곳에 피어나는구나!               


파도가 바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바다의 마음이 파도를 진정시키네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슴을 가득 채우니,     

아름다움으로 벅찬 가슴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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