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남자를 만나야 잘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많이 사람을 겪고, 시간이 흘러야 좋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능력이 생기는 지도 정말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시간, 사람을 사귀면서 터득하게 된 진리가 하나 있다면 사람을 만날 때 나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람, 그리고 그런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준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게 맞는 거 같더라.
이 역시 정답은 아니겠지. 그냥 요즘 내가 정답이라 생각하는 답이겠지.
어떤 게 맞는 답인 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특별한 여자로 만들어주는 남자라면, 그런 남자를 내가 좋아한다면 이걸 좋은 인연이라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 이 문장만으로도 나는 특별해진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깨달았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그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 흔하디 흔한, 사람 중에 1명인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래서 그 상황이 행복했던 것 같다.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봄이 되어버린 날씨에 옷차림은 제대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유리창을 넘어오는 태양은 언제나 따사롭다. 잔잔하게 온 몸을 감싸는 햇빛의 토닥임을 받으며 카모마일을 마시던 날. 나는 꽤나 심각했다.
“그냥 확 잘라버릴까.”
모든 여자들의 고민인 단발이냐 긴 머리냐. 나에게 잘 어울리는 건 긴 머리카락이라는 걸 알겠지만 왜 이렇게 단발로 자르고 싶은 ‘단발병’은 시즌별로 찾아오는지.
특히 나는 살면서 여러 번의 단발을 시도했지만 단 한번도 ‘잘 잘랐다’,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안 어울린다. 엄마는 절대 머리를 자르지 말라고 하며 여동생은 ‘언니의 흑역사는 단발인데 그걸 또 하고 싶어?’라며 진지하게 되물어보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남들이 그렇게 안 어울린다고 하니… 특히 정말 솔직하게 말해주는 가족이!! 그래서 난 머리카락을 자르더라도 매번 단발이라기보단 묶을 수 있는 머리, 긴 단발, 일명 ‘거지존’이 되기 직전 정도로 자르고 살아왔다.
그렇게 세상과 타협하며 잘 살아가던 중 또 다시 찾아온 단발병. 춥지 않은 바람, 봄기운과 함께 찾아온 단발을 하고 싶은 강한 욕구.
“응 잘라!”
그는 바로 대답해줬다. 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살짝 흘기며 말했다.
“진짜 너 몰라서 그래. 내가 얼마나 안 어울리냐 하면 난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머리를 신경 안 써서 쭉 기르다가 그냥 한번씩 확 확 잘랐거든. 그 때마다 다들 길었을 때가 더 잘 어울린다고 했었어.”
“예쁠 거 같아”
“아니라니까”
“아니야 예뻐”
나는 ‘아 모르겠다’ 혼잣말을 하면서 어깨를 넘어 등을 반 이상 덮고 있는 긴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그의 손길을 느끼며 난 계속 내 머리카락을 쥐고 있었다.
“넌 얼굴빨 얼굴빨”
“응?”
“넌 얼굴빨이야 단발이여도 긴 머리여도 예뻐. 어차피 얼굴빨이야”
그 순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던 말던 염색을 하던 말던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내가 사회적인 시선의 객관적인 미를 갖고 있는 소위 ‘예쁘다’ 지칭되는 연예인처럼 예쁘게 생긴 얼굴이 아니란 걸 잘 아는데, 그래서 내가 ‘얼굴빨’이 될 수 없다는 걸 아는데, “얼굴빨”이라며, “예쁘다” 말해주는 그의 말에 내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행복이 가득 피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정말 예쁜 여자가 된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수지보다 더 예쁜 여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