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하지 않겠다는 말에 온 집안이 뒤집어졌다.
'적어도' 결혼식을 해야 되지 않느냐부터 '못해도' 가족끼리 식사를 해야 된다는 말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순전히 나의 의견이었다.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결혼식을 혐오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안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결혼식을 하지 않으면 최소 2천만 원은 아낄 수 있다.
축의금으로 회수되는 돈이라는 말에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하셨다.
"네가 몰래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왜 결혼식을 안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결혼식 비용도 축의금으로 다 들어오는 건데 도대체 왜 결혼식을 안 하려고 하는 거냐?"
"결혼식에 쓰는 돈을 아껴서 더 잘살고 싶어요."
무한 반복일 뿐이었다.
결국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를 '무시'하는 거라는 말까지 나왔다.
부모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그렇다고 내 삶을 부모님에게 맞출 수는 없었다.
'내'가 결혼하는 것인데 결혼식부터 맞추기 시작하면 나는 끝도 없이 부모님 말에 끌려다닐 뿐이었다.
나는 딸, 딸, 아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80년대 생이니 아직 '아들'이 더 귀할 때였다.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 그리 예쁨 받지 못했다.
초등학생인 언니의 머리를 땋아주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난 엄마의 손길을 받지 못해
혼자 머리를 감고 유치원에 간 나였다.
엄마는 언니만 데리고 백화점을 옷을 사러 다녔다.
나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엄마랑 손잡고 옷 사러 가본 적이 없다.
아빠는 남동생을 아꼈다. 늦둥이에 태어난 아들이라 더 그러셨을 것이다.
집에 오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웃지도 않았다.
언니는 먼저 시집을 갔다.
결혼식도 성대하게 치렀다.
남동생은 아직 결혼이 남아있었다.
중간에 나까지 결혼식을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나는 결혼식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내 인생은 오롯이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살아간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환경의 탓도 하지 않는다.
혼인신고를 하고 1년이 되던 날, 사진을 찍는 친구가 있어 무료로 웨딩사진을 찍었다.
남편과 나 둘 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옷 중에 가장 깔끔한 옷을 골라 입었다.
인터넷으로 1만 원에 면사포를 구매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3만 원짜리 조화 부케를 샀다.
9월의 상암 하늘 공원은 아름다웠다.
우리가 촬영을 하는 동안, 수십 명의 스태프들을 동원하여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들을 보았다.
과거의 나였다면 그들을 부러워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타인과의 비교를 그만두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길은 그들의 길과 같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누가 알았을까.
결혼식을 하지 않은 것이 30년 살면서 한 선택 중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