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치신(以辛治辛)의 맵부림
이신치신(以辛治辛)의 맵부림
1998년에 우리나라에는 하루 평균 4개의 분식점이 새로 생겨났다고 한다. 이 해 12월 4일 조선일보에는 전국 분식점 수가 그전 해 대비 1446개나 증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IMF 구제금융 시기에 값싼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분식점이 엄청 늘어난 것이다. 이런 저가 시장의 호황에 힘입어 떡볶이 프랜차이즈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더구나 2000년대 말에는 정부에서 추진한 한식 세계화 품목에 떡볶이가 선정되면서 시장을 한껏 부풀렸다. 떡볶이 연구소가 설립되고 떡볶이 페스티벌이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떡볶이 요리 경연대회에는 온갖 기막힌 메뉴들이 선보였다. 하지만 몇 년 가지 않아 이 모든 사업은 씁쓸한 기억만 남긴 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그렇게 정책이 실패하는 사이 떡볶이 시장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시작해 분식점에 정착한 그 떡볶이와 같은 상품이지만 결코 같은 상품이라고 볼 수 없는 새로운 떡볶이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메뉴의 기발함으로 치자면 떡볶이 요리 경연대회 최우수상을 거머쥔 팀이 비슷한 시기에 강남역 등에 문을 열었던 떡볶이 레스토랑이 압도적이었다. 여기서는 대표 메뉴인 랩 떡볶이(싸 먹는 떡볶이)를 비롯해 온갖 새롭고도 요란한 메뉴들이 즐비했다.
이에 비해 내가 지금 얘기하려는 떡볶이는 따지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신당동에서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즉석 떡볶이처럼 떡과 어묵 이외에 이것저것 소위 ‘사리’를 많이 넣어 먹는다. 하지만 즉석에서 끓여 먹는 것은 아니고 주문에 맞춰 조리되어 나온다. 떡볶이보다는 전골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큼 국물이 흥건하다. 국물 속에서 매끈한 밀떡을 건져 먹으려면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할 정도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가지! 화끈하게 맵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떡볶이, 국물 떡볶이, 매운 떡볶이 등의 이름으로 시작했고, 특정 브랜드로 수렴된 이 떡볶이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젖혔다. 요즘 배달 앱에서 떡볶이를 검색해 보면 가격대가 둘로 나뉜다. 5000원 안 쪽의 떡볶이와 만원 대 중반의 떡볶이. 이 둘은 전혀 다른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가격대뿐 아니라 상품의 성격도 전혀 다르다. 기존 떡볶이가 간식이나 식사 대용이라면 이 새로운 떡볶이는 식사이거나 술안주이다.
흔히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적어도 고추가 유입된 이후로는, 지금처럼 매운맛을 즐겼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학교 앞 떡볶이, 함흥 비빔냉면 정도가 매운맛의 대표였으니 지금 같은 매운맛 전성시대와 비교하면 아주 순한 편이었다.
요즘 음식점에서는 매운 정도를 신라면에 비유해 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체로 신라면 정도라고 하면 약간 매운맛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매울 신자를 사용한 辛라면은 1986년에 시판된 이후로 오래도록 매운 음식의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살짝 매운 정도로 밀려난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코웃음을 치겠지만 1986년 당시 신라면은 정말 매웠다. 아니, 당시 사람들은 신라면을 아주 맵다고 느꼈다.
신라면 이후로 매운 음식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매운 정도도 점점 더 강해져만 가더니 드디어 불닭에 이르렀다. 개별 브랜드에도 불닭이 있고, 매운 닭 요리 일반을 불닭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불닭 볶음면의 세계적 성공 덕분에 더 유명해진 것이 불닭이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매운 닭요리는 IMF 금융 위기 직후 길거리에서 유행하던 닭꼬치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 매운맛을 강도에 따라 나눠 팔았고, 눈물, 폭탄 등의 감각적인 이름을 붙였고, 그걸 사 먹는 젊은이들이 놀이처럼 매운맛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떡볶이는 원래 매운 양념으로 조리했으니 매운 것이 당연하지 특별히 매운맛을 내세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지역별로 차이가 있어서 수도권에 비해 부산이나 대구는 좀 더 맵게 먹는 편이었을 뿐이다. 수도권에서는 너무 맵지 않은 지 물어보는 소비자는 많아도 더 매운 걸 찾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떡볶이에도 매운맛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매운맛을 찾는 고객이 늘어나자 분시점 떡볶이들이 좀 더 매워지고, 매운맛을 앞세운 브랜드도 생겨나 떡볶이에도 매운바람이 분 것이다. 새로운 떡볶이 시장은 그 와중에 열렸다.
사람들은 왜 매운맛을 좋아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매운맛의 중독성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매운맛은 미뢰가 느끼는 맛이 아니라 입안의 점막이 느끼는 통각, 온도감각이라고 한다. 즉 통증과 뜨거운 온도를 느끼는 것이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땀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운맛에 한 번 노출되면 다시 찾게 되고 다음번에는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마라탕이 중독적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중독적인 매운맛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고객을 불러들이는 좋은 수단이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매운맛 챌린지’가 게임 같은 즐길 거리 역할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스트레스 해소 효과, 다이어트 효과, 소화 촉진 등의 명분까지 더해지니 글로벌 트렌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운맛이 고통이다 보니 ‘맵다’라는 단어는 비유적으로도 많이 쓰인다. 손이 맵다, 회초리가 맵다, 바람이 맵다, 시집살이가 맵다 등등. 묵직하거나 아주 날카로운 고통이 아니라 아리고 화끈거리는 고통에 맵다는 표현을 쓴다.
이건 육체적 고통 보다 마음의 고통에 비중이 가 있는 표현인 것 같다. 상대가 내 기대보다 독해서 마음이 아리고 화끈거리며 서러운 것이 매운 것 아닐까? 내 몸을 후려치는 어머니의 손과 회초리가 조금 더 부드러웠으면, 아무리 엄동이라도 내가 먼 길 가는 날 하늘이 날씨를 좀 푹하게 해 줬으면, 시어머니가 조금 더 살갑게 대해 줄 수도 있을 텐데 … 내 사정을 헤아려 주는 인정을 기대했는데 배반당할 때 사람들은 맵다고 느끼는 것 같다.
매운맛에 탐닉하는 사람들에 대해 스트레스가 심한 현대인이 매운맛에 중독되고 있다는 등의 분석과 염려를 늘어놓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도 있듯이 매운맛으로 세상살이의 매움을 다스리려는 이신치신(以辛治辛)의 맵부림은 젊은이들의 건강한 자기 방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