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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해지다가도 다시 선명해지지만]

18. 불안했던 8월의 어느날

by 아피탄트

2024년 8월 13일


희미해지다가도 다시 선명해지지만


어느덧 첫번째 추적관찰을 통과하고, 두번째 추적관찰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항암치료 중에는 완전관해만 받게 되면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이전과 똑같아질 순 없을 것 같다.

여전히 불안하고, 또 가끔은 무섭기도 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다가도 다시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병원에서 맡던 익숙하고 괴로운 냄새를 지나가다 우연히 맡게 되었을 때,

새벽같이 택시를 잡아 항암주사를 맞으러 가던 그 날의 공기가 떠올랐을 때,

온 몸에 남아있는 암과 싸우던 흔적이 다시 내 눈에 들어오고 그런 내 자신이 측은해질 때,

예전 같았으면 힘들지 않았을 강도의 운동에도 숨을 헉헉대며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


그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또 그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내 머릿속의 나는 다시 항암병동의 창가 자리에 반쯤 누워 주사를 맞고 있다.

창가 너머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분주함이 그렇게 부러웠다.

병원을 다닌다는 건, 그것도 대학병원을 다닌다는 건 어딘가 좋지 않은 곳이 있다는 뜻일 텐데도, 아팠던 내 눈엔 그들이 참 건강해보였다.

구역감이 심했던 나를 배려해 간호사 선생님들은 비어있던 창가 자리로 안내해주셨지만, 나는 이내 창가 자리가 싫어졌다.


혈관이 약했던 나는 항암제 투여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없어서, 남들은 3시간이면 끝나는 주사를 5시간 6시간 걸려서 맞아야만 했다.

내 옆자리 사람이 두 번, 많게는 세 번 바뀌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었다.

몰려오는 구역감을 잊고 싶어서 물과 이온음료를 계속 마셨기에 자주 화장실이 가고싶어졌다.

구토 예방을 위해 신경안정제도 추가로 맞은 나는, 주사 바늘을 꽂은 채 몸을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다녀와야했다.


언젠가 아빠가 따라와준 적이 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던 길에 병동 밖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빠와 눈이 마주쳤었다.

그 때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안쓰러웠을까 아니면 대견했을까.

표현이 서투른 아빠는 별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긴 시간을 말 없이 기다려준 아빠가 참 고마웠다.

나는 그런 아빠를 위해, 어떻게든 괜찮아 보이려 애썼던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뜬다.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면, 이번엔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치료 종료 후 최종 결과를 듣는 날, 어차피 좋은 결과가 있을테니 무리해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엄마는 기어코 연차를 쓰고 따라오셨다.

교수님을 뵙고 암세포 하나 없이 깨끗해졌다는 말을 들은 그 순간, 엄마는 거듭해서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하다는 말씀을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엄마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다시 눈을 뜬다.

암세포처럼 힘들었던 기억들도 같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기억들은 희미해지다가도 다시 선명해진다.

그래서 불안하고 무섭다.

그 기억들이 다시 암세포를 불러낼 것만 같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 기억들 역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다보니 마음 속에 그늘진 부분이 참 많아졌다.

참 속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간 그 그늘 속에서 쉬게 되는 날도 생기지 않을까.

다른 누군가가 쉬다 갈 수도 있을 테고, 다른 힘든 일을 겪은 미래의 내가 쉴 수도 있을 터이니 그 그늘마저 잘 가꿔둬야겠다.


그러다보면 또 누군가 밝게 빛을 비춰줄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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