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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Apr 30. 2023

애쓰지 않아도

독후감

그리운 마음은 그 마음의 크기 그대로 분노로 변했다   


사랑과 증오가 같은 마음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건 사람만이 가진 능력일지 모른다. 같은 뇌에서 작용한다든가 하는 어떤 글이었는데 증오하고 미워하던 한 사람을 한순간에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한다.

무서워서 느끼는 떨림과 사랑의 떨림을 뇌는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최은영 소설가는 그 작고 사소한 점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구별시킨다. 『쇼코의 미소』를 통해서도 『내게 무해한 사람』을 가지고도 그는 그 찰나의 감정을 묘사했다. 그리고 그 형용하기 어려운 감성에 대해 따뜻하게 묘사할 줄 안다. 그것이 최은영 소설가가 가진 가장 큰 힘이었고     


  유나가 무슨 마음으로 내 비밀을 퍼뜨렸는지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유나가 겉과 속이 달라서, 교활해서, 내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유나가 내게 악감정을 지녔었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선망과 열등감을, 순간과 영원을 얼마든지 뒤바꿔 느끼곤 했으니까. 심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꼭 모순 같다 내게 무해한 사람처럼. 무해하다는 기준도 유해하다는 기준도 결국 상대적인 거니까. 그리고 그것은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이라고 꼭 힘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건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에 가족은 꼭 적어야 할지 모른다. 가족의 사랑이 있다는 걸 납득할 수밖에 없다는 건 사랑받고 자랐다는 증거일 테니까.     


사람은 너무나 모순적이다. 모순덩어리인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모순인데 모순이 모순을 가득하게 안고 살아가는 거 같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글쎄. 무슨 뜻인지를 꼭 애써서 알 필요는 없다는 거다. 난 지금의 자세를 소설에도 그대로 입각해서 읽는다. 서사를 꼭 이해하지 않아도 어떠한 따뜻한 감정선이 드러나고 읽히는데, 그것이 최은영 작가의 가장 큰 힘이다. 가만히 그 감정을 품고 이불을 덮으면 쉽게 잠이 온다. 쉽게 아침을 맞을 수 있다면 이게 마약이지.     


우리는 끝내 남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 같은 거다. 송문의 마음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이니까. 남을 질투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나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그를 이해하고 안다는 것과는 별개니까. 나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배울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자연스레 남에게도 귀결시킬 수 있는 거니까.


어쩌면 책 속의 내용처럼 우리는 데카르트의 후손일지 모른다. 니체처럼 채찍에 맞는 말을 안아줄 용기도 따뜻함도 우린 잃어버렸을 테니까. 그렇기에 내게 무해한 사람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짓는 미소, 그 미소를 알아만 볼 수 있으면 될 테니까.      


  너도 자라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니. 그렇게 따로 묻지 않았던 건, 외롭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란 꿈처럼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공기나 물처럼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가 그랬다. 저녁에 간단하게 마시는 맥주가 내 인생에선 없을 줄 알았다고. 그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그의 책상엔 빚 독촉장이 있었다고 한다 또래 애들은 문제집이 쌓여있을 때. 그가 바란 평범한 삶의 기준은 친구와 이야기 나누며 웃고 떠드는 맥주 한잔이었다. 데비 또한 그런 평범함과 거리가 먼 친구다.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누군가에겐 당연한 혹은 평범한 것이지만 평범의 기준은 꼭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같다. 어쩐지 더 슬퍼지는데


그런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아직 내가 인간적인 탓일 거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니체처럼 말을 안아줄 자신이 없다. 데카르트에게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였는데 나라고 별반 다를까. 정말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을 텐데. 나는 쇼코의 정확한 마음도 미소도 이해할 수 없다. 내게 무해한 사람도 유해한 사람도 잘 모른다. 어째서 애쓰는 사람과 애쓰지 않는 사람이 구별되는지 이해도 못 한다. 유나가 남의 비밀을 밝히고 다닌 이유도 당연히 모른다. 앞에선 사람 좋은 척하고 뒤에서 그랬던 이유를 한 명의 독자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어쩐지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스무 살엔 아무것도 모른 채 술을 즐겼다. 술과 함께 오가는 침 속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어떠한 사실관계도 확인할 수 없지만 이야기는 재밌었다. 남의 이야기가 가장 재밌었던 시절. 그때의 한 대학 동기는 유나 같았다. 그땐 애써서 그 친구를 이해하려 했었는데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나의 결론은 입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양가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막연히 싫지도 막연히 좋지도 그리고 이런 기분을 형용할 어떤 마땅한 단어 또한 생각나지 않는 어려운 감정. 그냥 사춘기적 감성보단 조금 더 복잡한 어떤 것이겠지. 그 어떠한 작은 점. 그 작은 점을 포착한다는 건 꼭 아래의 묘사 같아     


  마음이란 건 하도 걸어 물집투성이가 된 발바닥 같았다. 예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아니라.


위로받는 기분이다. 물집이 잡힌 발이 보기 싫어 신발 속으로 숨기곤 했는데. 누가 그것을 알아차리곤 밴드를 건네주는 기분이랄까.       


  연애가 삐걱거리면 적어도 한쪽이 관계를 이어가려고 노력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 관계에서는 누구도 그런 간절함이 없었다. 자신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인지,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유진은 자리에 누워 곰곰 생각해봤다.     


그 작은 점이 모이자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소설도. 소설 속 인물도. 모두. 모두가 사랑스럽다는 마음은 꼭 신 같아서 내가 뭐라도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신을 믿지 못해서 인문학을 읽었던 건데. 그래서 죽으면 묻고 싶었다. 왜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냐고. 언젠간 만나게 될 신이 있다면 세상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잔뜩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냥 침을 삼키기로 했다. 침을 삼키고 주변을 둘러본다. 조용한 강의실. 학교 건물. 의자. 사물함. 멀티탭. 멀티탭에 꽂힌 휴대폰 충전기와 노트북 충전기. 반만 내려간 블라인드. 불 꺼진 교수 연구실. 연구실 문엔 나에게 비제로를 준 교수의 이름표가 보이고.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본다. 무엇을 위해 난 애썼을까. 사랑을 갈구했던 과거가 있었고 돈이 전부인 줄 알았던 한때가 있었는데. 텀블러에 담긴 물처럼 난 언제든 새로운 물을 담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물은 비우고 음료를 받고 씻고 하는 것이 자유로울 거로 믿었는데.


이런 맥락 없는 글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그냥 작은 참회록. 아니 그냥 일기가 어울리겠다. 윤동주 시인처럼 손으로 발로 닦아보곤 했던 참회록은 나에게 사치니까. 그냥 그리웠던 마음만큼 분노하기보다 세상을 사랑하기로 했다.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힘내봐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힘은 포기하지 않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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