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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무서웠대.

아이들 이야기 5

by 핑크레몬


















둘째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문득 물었습니다.

“엄마는 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 나 이제 고등학생인데 나중에 알아서 충격받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나만 모르고 있는 일 없었으면 해.”


아이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돼서 그때까지 엄마, 아빠의 진짜 이혼 이유를 숨겨왔었습니다.

사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둘째의 말에 더 이상 숨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면 더 슬플 것 같았습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뭔가를 눈치채고 말했던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무서웠습니다. 지금까지 아빠와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는데 행여라도 이 사실 때문에 사이가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만 약속해 줘.

아빠는 엄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을 뿐 너네들에게는 좋은 아빠였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엄마와 상관없이 좋은 아빠란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변함이 없으니까. 행여라도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엄마는 무서워.

그걸 약속해 주면 엄마가 사실대로 이야기해 줄게.”


어떤 이야기일지 둘째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덤덤하게 사실대로 알려주었습니다.


아이는 조용히 울었습니다.

나도 울었습니다.

다시 말했습니다. 아빠를 미워하지 말라고요.


"엄마는 그 사실을 가슴에 품고도 우리를 그렇게 열심히 키운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도 어떻게 이런 성숙한 대답을 할 수 있는 걸까요?


둘째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습니다.

좀 더 순화시켜줄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빠와 잘 지냈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아빠와 둘만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이제 고등학생이니 엄마랑 왜 이혼하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아빠는 잠시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궁금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이에게 어떻게 말했을지.

조금은 순화해서 말을 했을 수도 있고

시어머니와 그랬던 것처럼 본인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을 할 수도 있고

뭐라고 했을지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마음에 그 어떤 동요가 없는 것처럼 들었습니다.


“다행히 아빠는 엄마가 말한 것과 똑같이 말했어.

모든 건 아빠 잘못이라고.

엄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눈물을 삼켰습니다.

내가 울면 아이도 울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덤덤하게 말하는데 내가 울면 같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이혼 당시에 그 사람도 힘들어서 망언을 했던 것이었을까요?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서도 엄마랑 또 똑같은 말을 했어.”

이혼사유 말고 또 똑같이 말할 내용이 있나? 귀를 쫑긋하고 들었습니다.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무서웠대.

하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야 될 것 같아서 용기를 냈다고.

내가 아빠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빠는 할 말이 없대.

아빠 잘못이니까.”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어?”

“음…... 사실 엄마한테도 똑같이 물었다고 했지..

근데 아빠가 그때 일을 엄마랑 똑같이 말했고.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맙다고.

아빠가 한 잘못은 앞으로도 용서 못 할 거 같지만, 그래도 아빠로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한다고 말했어.”


자신의 지난 외도를 딸에게 고백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비겁하지 않은 전남편이 고마웠습니다.

용기 내준 전남편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성숙해져 버린 둘째가 대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사랑하는 둘째가 고마웠습니다.


나는 밖에 나가서 혼자 한참을 울었습니다.

정말 모든 게 다행입니다.

역시 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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