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앞발로 꾹꾹이를 하는 이유는
어머니 산소에는 잘 다녀오셨는가?
돌아가신 분을 묻어 둔 곳이라고는 하지만
돌아가신 분을 만나는 약속장소라고는 할 수 없는 곳,
백골이 진토 되어 자녀들의 발걸음도 끊어지고
넋조차 찾아오기 어려운 곳이 되기 전까지는
칡넝쿨이 휘감고 무성한 잡풀이 뒤덮이는 모습을 차마 방치할 수 없는 곳.
시들지 않고 꽃 피웠다고 감상할 사람도 없지만
봄가을 찾아갈 때마다 뭐라도 한 송이 놓아두고 와야 미안하지 않은 곳.
산소는 그런 곳이지,
돌아가신 분이 있지도 않지만, 없지도 않은 곳.
우리에게는 그리워하며 찾아갈 부모 무덤이라곤 없다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며 태어나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만 생기면 헤어져 살다가
목숨이 다하는 순간이 가까워오면
어디론가 숨어 들어가 주어진 생을 마감하게 되니,
찾아갈 무덤도 없고 찾아올 자손도 없이
그렇게 살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묘생.
그러나
자신을 낳고 길러준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랑했다거나 미워했다거나 하는 감정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새겨진 습성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따뜻한 담요 위에 앉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발로 꾹꾹 누르며
어머니의 젖가슴을 찾고 있다네.
내 두 앞 발로 아무리 열심히 눌러본다 해도
나를 먹여준 어머니의 젖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허름한 담요일 뿐이지만
조물주는 그렇게라도 헤어진 어머니를 그리워해 보라고
우리네 뼛속 깊이, 본성적 행위로 각인시켜 놓은 것 같아.
그러니
어쩌면 '그리움'이라는 명사는
내 마음과 의지를 보탠, '그리워한다는' 뜻보다
마음의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저절로 '그리워지는' 현상에 더 기울어진 단어 같아.
산소를 찾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마지막이 되어 버린 그즈음의 공기와 햇볕의 양으로, 풍향만으로도
저절로 그리워지는 사람, 엄마 어머니.
우리의 앞발 꾹꾹이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그리움이 담겨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