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성.
삶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삶의 방향성이 흔들릴 때 삶이 흔들린다.
삶의 방향성이 없어질 때 삶이 무너진다.
용서와 사랑,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랑과 용서, 사랑이 먼저인가, 용서가 먼저인가.
용서하는 마음이 조금 더 생기면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가 되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생기면 미움이 더 앞서니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거다. 용서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 똑같다. 동전을 던질 때 앞이 나오는 확률, 뒤가 나오는 확률 반반이다. 사랑과 용서, 사람의 마음 그릇에 반반의 물로 차여서 흔들릴 때마다 용서가 될 때도 있고, 사랑이 될 때도 있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 그것은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저절로 되어야 용서이고, 사랑이다. 용서와 사랑에 무슨 조건이 필요할까. 조건을 내세울 때 이미 용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용서에 조건을 붙이는 사람에게 과연 용서가 될까. 그 용서는 타협이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을 때 할 수 없이 잠시 하는 용서흉내일 수도 있다.
가짜 용서는 잠시는 달콤하다. 가짜는 진짜를 대신할 수가 없으니까 삶은 흔들린다. 그리고 무너진다.
신뢰와 믿음의 골조가 튼튼하지 않으면 서 있지만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런 삶은 곰팡이가 들 수도 있고 좀이 들 수도 있다.
기묘한 일, 기이한 일을 한 번 당해보라. 쉽게 용서가 되고, 쉽게 사랑이 될까. 괄호 밖의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괄호 안의 사람은 어떨까. 그것도 애지중지 중요하게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이라면.
어느 날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에 사람은 어떻게 방어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원인을 알아야 어떻게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때는 방어능력도 필요 없는 방어능력이 된다. 원인을 모르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캐내어 보려고 노력을 해도 원인을 끝까지 숨긴다면 이미 그 방어는 방어가 필요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게 된다.
<성대결절> 성대결절에 걸렸다. 목이 아픈 게 뭔가 달랐다. 감기나 몸살로 오는 열 같지가 않았다. 뭔가 안에서 상처가 난 것처럼 걸린 것 같고 묵직한 통증이 있고 옆으로 이리저리 돌려보니 음식이 내려가는 곳인지, 뭔지 어디가 굉장히 불편하고 돌릴 때 많이 아팠다.
토요일 오후에 갑자기 느낀 통증이어서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진료를 할 수가 없었다. 병원 문이 다 닫혔다. 주말 내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많이 잘못된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 이비인후과를 갔었다. 입을 크게 벌리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상한 기구를 넣었다. 허리를 앞으로 약간 구부리고, 목을 약간 내밀어 개처럼 구부리게 한 후, 의사 선생님은 목 안을 살펴보았다. 내가 앉은 의자 바로 옆에서 조금 앞으로 있는 의료기 영상에는 내 목구멍이 보였다. 진단은 성대결절이었다.
직업을 물었다. 보통 가수들이나 강사들이 많이 걸린다고 하면서 말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주의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약은 잠시의 통증이 가라앉는 정도라고 한다. 말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1주일 후에 다시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2주에 1번씩 경과를 보면서 치료를 해야 하고, 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달 정도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타고난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했었다.
4년 전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다정했었고 주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업장을 개원한 이후부터 남편과 이야기하면 목에 힘이 많이 들어갔었다.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았다. 대화할 때 건성적인 대답, 무대답, 무표정. 다음 이야기로 연결이 안 되었다. 주로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뭔가를 계속 읽고 있었다. 진짜 읽고 있는지, 눈을 그곳에 두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10번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뻔한 대답을 하니, 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나는 신경 안 쓴다", "상관없다"는 말에, 그런 피드백에 나는 말할 때마다 목소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 화가 나서 몇 년 전에 식당에서 남편의 행동을 따라 해 보았다. 내가 하니 휴대폰을 보지 않고 나를 보기도 하고 식당 주변을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남편의 행동을 따라 해 보니 내가 못나 보였다. 나쁜 것은 따라 하지 말자.)
의논을 하고 있는데 벨트를 만진다거나 일어나서 신발을 닦는다거나 눈을 맞히지 않는 대화를 했었다. 왜 눈을 안 보고 딴짓을 하면서 듣느냐? 듣고는 있느냐? 하면 왔다 갔다 해도 들으면 되는 거, 아니냐?
남편은 나쁜 버릇들이 자꾸 생겼다. 그리고 눈덩이처럼 나쁜 버릇들이 커져갔다. 일상생활, 일상대화에서 나오는 비속어는 욕들은 나를 미치게 했었다.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 무시당한다는 느낌, 나를 미치게 했었다.
23년 동안 국어논술 강사로 많은 수업을 했지만 감기 한 번도 걸리지 않은 나였다. 목이 아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 4년, 남편과 싸우는 날이 많았었다. 365일 중 싸우는 날이 더 많았다. 한 번 싸우면 몇 시간씩 싸울 때도 있었다. 서로 고함을 치고 거친 말들을 하고 이런 원수는 없을 것처럼 싸웠다.
그래서 나는 덜컥 성대결절에 걸렸다. 의사 선생님이 한 두 달은 말을 아예 하면 안 된다고 했었다. 말을 하면 성대가 두꺼워져서 원래의 목소리를 잃게 되어 탁하고 센 목소리가 될 수 있다고 했었다. 노래하는 가수만 걸리는 줄 알았는데, 내가 성대결절에 걸렸다.
의사 선생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톤으로(자신에게 편안한 톤의 높이가 있는데) 말을 하지 않고 더 낮게 또는 더 높게 말을 많이 하면 성대결절에 걸릴 수가 있다고 했었다. 다행히 설명도 잘해주시고 진료를 잘해주셔서 두 달 정도 지난 후, 성대결절은 완쾌되었고,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간간이 잘 건조해지고, 갑자기 숨이 멎을 것까지 힘이 들 때가 있다. 바로 그 순간에 사탕을 빨거나 음료를 먹지 않으면 아주 힘이 든다. 핸드백 속에 사탕 1~2개를 넣고 다니거나 작은 음료 하나 정도는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남편이 원했던 사업장은 한 마디로 롤러코스터였다.
결혼생활 하면서 싸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두 사람 다 조용한 성격이고,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웬만하면 대화로 풀어갔었다. 그런데 사업장을 함께 운영할 때는 그도 나도 롤러코스터가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이 며칠 편하게 지내다가도 사업장에서 예측불허하게 일어나는 일들로 우리 두 사람의 감정은 기복이 심해져 갔다. 서로 고슴도치가 되었다.
사업장은 직원의 일로, 수급자의 일로, 보호자의 일로 힘들 때가 더 많았다. 런던,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처럼 사람을 우울하게 습하게 만들었다. 물론 보람 있었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불행의 씨앗을 여기에 심었고, 우리의 불행을 키웠다. 아무도 우리의 불행을 자를 수가 없었다.
작은 오해가 큰 오해를 만들었고, 작은 착각이 큰 불신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챙기고 옆에 없으면 보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보면 무슨 심술이 나는지 할퀴고 서로를 미워했다. 그리고 원망은 망가진 신뢰를 회복하는 작은 틈조차도 주지 않았다.
어떻게 말하면 가장 쉬울까?
돌아가는 상황들이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한 마디로 쉽게 말하자면 나는 소위 상사를 잘못 만난 거였다. 상사를 잘못 만난 부하직원, 그런 직장에 다녀 본 사람이라면 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일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와 일했었다면 그 누군가는 나를 인정하고 나를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했을 것이다. 나에게 매뉴얼을 가르쳐주었을 것이고, 내가 일을 잘할 수 있는 환경 조성, 조직도에 맞는 업무체계, 의사소통을 했을 것이다. 남편 말대로 남편은 본인 꼴대로 했었다. 나는 12살 가시나 같다고 화를 냈었다.
<코로나> 코로나는 전염병이다. 어떤 우연이나 요행, 운으로 비켜가기가 어렵다. 한 개인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고 있는 환경에서 비켜가기는 어렵다. 코로나가 있는 몇 년 동안 수급자, 보호자, 직원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곳곳마다 휴원 조치가 되고 있었지만 나의 사업장은 끝까지 휴원 조치 없이 청정지역으로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엄격하고 꼼꼼한 관리가 한몫을 한 것이었다. 어르신을 아침송영(이동서비스)하는 차로 모시기 전에 신속항원검사부터 하였고, 센터 안에서도 코로나 있기 전부터였지만, 개인위생을 강조한 일회용 핸드 타월, 일회용 컵을 사용하였고, 손 씻기, 예방접종, 건강상태 살피기, 안전예방 안내문 보내기, 센터 안에서 교육하기 등 물론 다른 센터에서도 남다른 노력을 하였겠지만, 단연코 개인위생 관리와 오전 송영 전에 가리는 신속항원검사가 관건이었다고 본다.
나의 노력 덕분으로 나의 사업장은 휴원 조치 없이 잘 버텼다. 그러나 막바지에 정부의 코로나 신속 대응이 유연해졌을 때 5월 초, 어르신들이 가족들과의 식사 모임 이후, 한 두 명이 코로나에 걸렸다. 그 후, 갑자기 삽식간에 어르신들과 직원들의 3분의 2가 전염되어 센터는 휴원 조치가 되었다.
그날 당일, 나는 전염되지 않은 어르신들과 직원들의 전염을 막기 위해 신속한 조치를 하였다. 집으로 귀가 조치를 최대한 빨리 하기 위해서 우선 어르신들과 직원들에게 현재의 정확한 사실을 알렸다. 안전하게 귀가할 때까지 물을 먹지 말자고 하였다. 두 시간 정도만 참으면 되니, 참아보자고 하였다. 물을 먹으려면 마스크를 벗어야 하고, 전염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공기로 비말로 전염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하였다.
일회용 컵의 사용을 중지하고 모두들 일회용 장갑을 끼게 하고 일회용 위생복을 입고 나의 조치대로 하였다. 어르신들이 댁에 가서 점심식사를 할 수 있도록 수육도시락을 준비하고 드디어 오전 10시 30분쯤 되었다. 모든 준비를 만만히 한 후, 어르신들을 귀가시키고 직원들은 각자의 집에서 수육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에 2시쯤 다시 집결하여 3시 40분까지 센터 안의 방역소독을 하고 귀가시켰다.
그런데 이 모든 조치에 대해서 상의를 함께 하고 모든 행동을 같이 한 남편은 직원들과 어르신들이 다 가고 난 뒤에 나에게 기막힌 일을 벌였다. 센터 안에서 4시까지 보건소에 서류 작성을 하여 보고를 해야 마무리가 되는데, 내가 직원들과 마지막 방역소독 마무리를 할 동안, 남편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신의 행정업무를 다 끝내고 난 뒤에 아직 서류 준비로 바쁜 나에게 직원들을 4시까지 일하게 하지 않고 조금 일찍 귀가시킨 걸로 벌컥 화를 엄청나게 많이 냈었다. 유리문 밖을 보니 직원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럼 당신이 직원들 있을 때 이야기하지 않고 직원들이 인사를 하고 갈 때 왜 가만히 있었느냐?"
"4시까지 있어라 하고 방역소독이 덜 된 곳 확인하고 그러지. 나는 지금 보건소에 보고할 서류를 아직 하고 있는 중인데, 대표가 나서서 이야기하면 될 걸 왜 지금 직원들이 나가고 나서 바로 이렇게 화를 내느냐. 있을 때, 직원들한테 이야기 안 하고, 직접 이야기해도 되지 않았냐? 직원들이 인사하고 나갈 때 왜 가만히 있었느냐?"
4까지 보건소에 서류를 보내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해야 하는데 남편은 계속해서 화만 냈었다.
그리고 그다음이 더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나는 3월 말부터 성대결절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진단으로 수첩 또는 쪽지에 적어서 직원들과 소통했었다. 말을 하면 안 되었을 때였는데, 남편은 자신이 혼자 해도 무방한 일을 갖고 나에게 또 짜증을 냈었다. 일일이 보호자들께 전화할 일을 얼마든지 천천히 혼자 하면 될 일을 나와 같이 나누어서 하자고 했었다.
"혼자 어떻게 다하냐."
"문자 했으니까, 전화는 천천히 해도 됩니다."
"나 혼자 어떻게 다하냐? 같이 해야지."
"일단은 보건소 서류를 4시까지 보내고, 문자를 했으니까, 우리도 빨리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화는 집에 가서 천천히 해도 됩니다."
"지금은 코로나에 대해서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처음 코로나 발생했을 때 하고는 상황이 다릅니다. 보호자들도 다 이해를 합니다."
쪽지에 적을 수가 없었다. 4시가 다 되어 가는데, 서류를 마무리해서 보건소 담당자에게 메일로 보내야 하는데, 나는 목을 쓰는 게 겁이 났지만 할 수 없이 겨우 말을 했었다.
급한 일부터 / 먼저 해야 할 일부터/ 응급적으로 해야 할 일부터 다 끝냈다. 그러면 "수고했다"가 먼저다.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이른 아침부터 일사불란하게 위기를 잘 처리하고 일을 잘 마무리했었다. 이제 우리만 마무리하고 빨리 피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 환경에 오래 노출하면 위험한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오래 걸려도 몇 시간, 빨리 처리해도 두 시간 정도면 된다. 일단 우리의 안전도 중요하니까,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서 집에 가서 천천히 전화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남편 혼자서 전화를 해야 한다. 지금 성대결절로 한 달 이상 말하지 않고 수첩과 쪽지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나에게 같이 전화업무를 하자는 것이다. 남편은 평생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어서 아픈 게 어떤 건 지를 잘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성대결절로 어떻게 아픈지를 어떻게 센터 일을 하는 지를 다 지켜본 남편이 하는 말이, 내게는 파렴치하게 들렸다. (코로나 막바지에 휴원조치로 가게 된 중요한 계기를 남편은 안다. 내가 끝까지 방어하고 지킬 수 있었던 센터, 휴원 조치까지 가게 된 그 원인들, 내 말대로 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검사도구가 내 목구멍을 걸쳐서 컴퓨터 화면에 성대가 나오는 영상 사진, 그 검사를 하고 진단을 받고 과정을 보여줄 때 남편을 동행시켰었다. 의사 선생님은 관리 방법과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하는지 남편에게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고, 그 설명을 나와 함께 들었다. 그런데 이런 폭발적인 화냄과 심한 말과 행동으로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주었다. 나는 겨우 남편을 달래어서 일단은 진정을 시키고, 그 센터 사무실에서 보호자에게 전화를 다 하는 것을 지켜보고,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었다.
참으로 고달픈 하루였었고,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팠었다. 일을 잘 처리했음에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고 심한 말을 하고 나를 힘들게 했던 고달펐었던 하루, 그런 날이 4년 내내 많았었다. 이 센터 일을 시작하자마자 그리고 내가 퇴직하고 나올 때까지 나를 아주 슬프게 괴롭게 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었다.
아내였고 엄마가 아니었으면, 그냥 일반 직원이었다면 나는 4년을 그렇게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 차려놓은 밥상을 먹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밥상에 있는 밥을 먹으면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걸 알고 누가 그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죽길 작정했으면 그 밥을 먹고 죽으면 되고, 살기로 했으면 그 밥을 먹으면 안 된다.
나는 그가 집에 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혼을 결정했지만 이혼을 하는 데는 3년 정도 걸릴 수 있을 거라고. 그가 "나는 당신이 잘 되기만 하면 나는 이혼해도 된다"그런 말을 센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그런 식으로 말했었다. 자신은 상대방이 잘 되기만 하면 이혼을 해도 괜찮다는 사람으로 산다고 하더니, 막상 나의 인생을 위해서 이혼을 결정하니 이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댔었다.
그래서 나는 진짜이혼은 좀 유보했었다. 4년 동안 우리는 이혼을 많이 거론했었다. 그러나 계속 살았다. 치열한 전쟁 같은 공포의 부부싸움을 하면서도 우리는 센터 일을 열심히 했었다. 센터를 키우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나는 지금 퇴직하고 이혼을 한대도 남편과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컸었다.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 이혼하면 안 되는 그의 이유가 내게 시간을 좀 유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혼, 이혼했는데, 이혼은 언제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이혼, 법적인 조치를 하는 것보다는 내가 좀 안정이 된 이후에 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의 인연은 지독하다.
한 공간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랑과 용서, 용서와 사랑이 교차하면서 살아갔었다.
나는 내가 이혼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이혼 결정"을 하고 나니 내 속이 후련해졌다.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의 결혼생활 30년과 그와의 1년 연애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기회로 그와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현재 휴전, 싸우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마그마 같은 부부갈등을 숨기고 살고 있으니까. 우리의 감정이 아파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그와 나는 첫사랑이니까, 27년을 자식 낳고 자식 키우고 온갖 일을 함께 한 동고동락의 사이였으니까, 4년 치열하게 살아온 동지였으니까, 나의 새로운 삶과 인생을 위해, 나의 시작을 위해, 나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인생에 집중하고 전념하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는 잠시 이혼은 유보하고 이혼을 잠시 생각하지 말고, 그와 함께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을 보내는 주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혼을 하고 이별을 한 후에라도 마지막은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 새로운 추억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그도 새롭게 새 출발을 한다고 해도 나는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새 출발을 위해서 조금의 미련도 남기고 싶지가 않았다. (2023년 10월쯤 생각이었습니다.)
<2024년 4월 어느 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양가감정을 갖고 살아왔지요. 어떤 날은 좋고, 어떤 날은 밉고, 어떤 날은 애달프고, 어떤 날은 속상하고, 어떤 날은 또 좋고 반복하면서 흔들리면서요.
연출된 특정 시간, 공간 안에서 존재할 때만 배우처럼 남편 역할에 충실하네. 그런 생각을 나는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스스로 가곡, 가요, 팝송, 발레, 클래식한 연주를 듣지 않는 그입니다. 그런데 그도 가곡, 가요, 팝송, 발레, 클래식한 연주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오페라, 연주회, 음악회 예매하기 전에 물어보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와 함께 이런 공간에 가서 그 분위기에 취하고 클래식한 향기에 머무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 덕분에 요즘 좋은 곳에 많이 다닌다."
이런 듣기 좋은 칭찬을 하며 행복해합니다. 눈이 웃고 있고,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전시회나 음악회에서 웃고 있는 기념사진을 친구들, 지인들 모임 밴드에 가끔 올립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은 올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 예뻐서 안돼."
멋진 포즈를 취한 남편의 모습을 찍어주면 그는 단독 자신의 사진만을 올립니다. 그리고 들어오는 카톡을 보며 그는 아주 기분이 좋아집니다.
"녀석들, 못 생긴 마누라랑 찍은 사진을 아주 좋다고 올려."
그렇게 말하면서 행복해하는 남자, 어쨌든 우리는 많이 웃었습니다.
즐겁고 행복해서 웃으니 즐거워지고, 즐거워지니 행복해졌습니다. 좋은 감정이 나쁜 감정을 상쇄시킨 걸까요? 그동안 수없이 싸웠던 날들, 그런 날들이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일상이 명쾌해졌습니다.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사니 혼란을 겪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어쨌든 나라는 여자가 움직여야, 행동해야 우리는 뭔가가 된다. 이루어진다. 그것이 나쁘지는 않은데, 나도 남편이 좋은 리드, 멋진 리드를 해주면 좋겠다. 가끔은 나도 좋은 안내자가 나를 인도해 주고, 나의 짐을 덜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는 잘 따라오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왜 4년을 그렇게 시작했었고 보냈을까.
새로운 낯선 공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공간, 그런 공간을 한 주 동안 준비해서 일요일에 집에 있지 않고, 하루종일 그런 새로운 낯선 공간에서 함께 새로운 시간을 보내니, 아픈 말과 이야기들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이 적중했었습니다. 금방 되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그렇게 예쁘게 우리를 둥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쁜 이별을 준비했었던 시간들이 예쁜 시작으로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점점 웃는 날들이 많아졌고, 웃는 날들로 채워지니, 깨진 일상들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치유가 시작되고 있었던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도 나도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때로는 여자로 산다는 건 힘든 일이죠
단 한 남자에게만 모든 사랑을 주면서
당신은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그 남자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겠죠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면서
(타미 와이넷이 부른 Stand by your man의 일부 가사)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로 뜬 눈으로 지새웠고, 잠을 이루지 못했었고, 말라갔었고, 끊임없이 싸웠었다. 27년 부부의 소소한 일상이 없어진 현실에서 부대끼면서 살았었다. 그런데도 부부의 인연은 지독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