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여유가 왔을 때

by 김현정

나를 돌아본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겠다.


올 가을에 계획했었던 일들이 좀 색다르게 바뀌었다. 준비한 4절지 켄트지와 4B연필을 휴대하는 미술통에 넣어서 가볍고 설레는 마음으로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수강교실은 협소했다. 입구에서부터 풍기는 기름냄새가 나를 서성이게 했다. 유화물감이 그 공간에 다 배인 냄새, 찌든 냄새였다. 몇 사람이 먼저 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스케치한 인물 데생이 벌써 반 정도 이상은 진척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한 초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그 공간에서 2시간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수강을 취소했다. 그 백화점의 문화센터에 수강한 영어 수업, 한국 무용 수업도 수강 취소했다. 다른 백화점의 문화센터에 수강한 수업들과 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덕분에 선택이 쉬워졌다.


수요일의 팝송 수업과 전신플로우필라테스 그리고 목요일의 영어회화수업과 라틴라인댄스 수업은 나의 기대를 흡족하게 해 주었다. 팝송 선생님은 정적인 분, 영어회화 선생님은 동적인 분, 전신플로우필라테스 선생님은 꼼꼼하게 수강생 한 명 한 명 자세를 잘 잡아주시는 친절한 분, 라틴라인댄스 선생님은 동작이 크고 춤을 멋있게 추는 분. 수업은 10분 간격으로 있어서 바쁘다. 화장실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화장실에 갔다 와서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필라테스, 댄스화로 갈아 신고 라틴라인댄스. 다른 수강생들이 다 준비된 곳에서 자리를 잡고 하게 된다. 호흡 준비를 하지 못하고 바쁘게 자리를 찾아서 하게 되는 것은 유감이지만 1시간이 알차서 좋다.


필라테스를 하고부터는 근력이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 체력이 많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병원과 약국에 돈과 시간을 다 갖다줬는데 시간과 돈을 적절하게 잘 쓰는 것 같아서 이 부분도 나를 흡족하게 해준다.


아파트 안의 미술학원도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선생님이 앉아 계신 것을 발견했지만 나는 상담을 받지 않고 돌아왔다. 입구에서부터 풍기는 여러 가지 냄새.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냄새들이 섞여서 나는 그 냄새가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마침 영상미디어센터에서 8회 차 디지털드로잉수업이 개설되어 수강신청하는 날 오전 10시에 기다렸다가 바로 신청을 했다. 월, 화요일 오전 수업으로 한 주의 시작과 하루의 시작에도 나를 흡족하게 해 주었다.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수업 2시간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스피치 수업이 8회 차, 저녁을 먹지 않고 가야 한다. 2회 차 수업을 받았는데, 스피치 수업은 발음 교정과 말하기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시청 아나운서 선생님이 지도를 해주시는데 실력이 좋았다. 특히 인성이 좋으신 분이시고 성격이 밝고 쾌활하다. 젊은 여성이신데 나는 이 수업이 제일 재미가 있다. 모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누가 할 것 없이 처음 배우는 스피치라서 피드백을 많이 받는다. 모두들 웃음보따리를 풀어놓고 한다.


언제 내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웃었나? 싶을 정도로 웃게 되어 행복하다. 발랄한 여고생이 된 것 같다.


앉아서 하는 말하기 연습은 표준어에 발음도 정확한 편이어서 특별히 피드백을 많이 받지는 않는 편인데, 나는 무대공포증이 생겼나? 발표할 때에는 기대에 못 미친다. 생각보다 한 두 개 발음이 샌다. 발표는 자꾸 하다 보면 느는 것이니까 마음을 편히 가져본다. 좋은 날을 그려본다. 나는 스피치 수업이 재미가 있고 또 나의 미래 계획을 위해서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 나와 잘 맞는 수업인 것 같다. 관심도 많이 가고 흥미가 생긴다.


프리미어 프로, 다빈치 리졸브 수업은 다음 코스는 하고 싶지 않았다. 숏폼과 유튜브 영상 하는 법을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영상을 보는 것은 꽤 즐겁지만 만드는 것은 나는 크게 재미를 못 느꼈다.


가곡 수업과 미술사 수업은 시간이 잘 맞지가 않았다. 다음으로 유보해서 좀 아쉬웠다. 그런데 영상미디어센터에서 4회 차 미술로 보는 영화감상 수업이 다행히 생겨서 멀리 가지 않고 미술영화로 보는 미술의 역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좋아하는 미술 공부를 영화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을날 10월에는 깊어가는 가을처럼 나 자신이 충만해질 것 같다. 미술적 스타일이 돋보이는 영화관람을 한 후에 영화 속의 미술사 공부와 미술적 표현 관계를 배울 수 있게 되면 앞으로 영화 감상이 다채로워질 것 같다. 그리고 깊어질 것 같다.


어떻게 어느 자리에서 내가 바라는 예술가로 살게 될지는 모르겠다. 어떤 예술가로 살게 될지는 모르겠다. 어떤 예술가의 이미지, 문양, 무늬가 보여지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나는 남편에게 무작정 "나는 앞으로 예술가로 살 거예요."

나는 그렇게 나의 미래를 말했었는데, 나의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겨줄지 나도 궁금하다.


오늘은 9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인데 그래서 설렌다. 다음 10월, 11월, 12월이 설렌다.

몇 해 만에 맞보는 설렘과 기대감인가? 나를 충만하게 해 준다. 다시 젊어진 느낌이다. 얼마만인가!

keyword
이전 27화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