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Ⅰ. 존재의 퍼즐: 아빠라는 사람
지금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나 스토리 작가가 직업으로 인정받는 시대다. 그러나 1990년대는 창작 활동을 직업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고 지식재산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다.
또한, 당시 스토리 작가는 낯선 개념이었다. ‘작가’라는 호칭은 주로 소설가나 시인을 의미했다. 드라마, 영화, 만화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을 지칭하는 명확한 명칭이 없었다. ‘만화가’라는 단어도 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뜻했다.
만화 스토리 작가였던 아빠는 전통적인 작가의 정의로도, 만화가의 정의로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았다. 만화가이기도 작가이기도 하지만, 엄밀하게는 작가도 만화가도 아닌 셈이었다.
“넌 언니나 오빠 있어?”
“아빠나 엄마는 뭐 해?”
초등학교 고학년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질문이었다. 내가 아빠는 작가라고 대답할 때마다 친구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되물었다.
“우와! 소설가야? 책 제목이 뭐야?”
“아니. 소설가는 아니야.”
내가 단호하게 부정하면, 친구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작가라며. 그럼 무슨 책을 쓰셨어?”
“우리 아빠는 만화 작가야.”
나는 작품명을 언급하는 대신 ‘만화’라는 단어를 ‘작가’ 앞에 덧붙이는 것만으로 아빠의 직업을 설명하려 했다. ‘만화’라는 단어에 친구들의 눈빛은 더욱 반짝거렸다. 90년대는 동네 골목마다 만화 대여점이 있었고, 100원짜리 동전 몇 개만 있으면 누구나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의 세계로 쉽게 빠져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연재하던 만화 잡지는 연령 제한이 있었다. 자랑하고 싶은 아빠의 작품을 나와 친구들은 들여다볼 자격이 없었다. 아빠의 창작 세계는 물리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정서적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러면 너희 아빠 그림 진짜 잘 그리시겠다!”
감탄 섞인 오해에 나는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을 꺼내야만 했다.
“아빠는 그림을 그리진 않아. 대신 이야기를 만들어.”
아빠의 창작 과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이었다. 인물의 성격과 배경, 정서와 행동 동기까지 세심하게 설계했고 그에 맞는 대사를 썼다. 만화 콘티를 구성하고, 빈 말풍선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이야기의 흐름과 연출까지 도맡았다. 이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는 멋있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아빠는 점점 더 희미해지곤 했다. 작가에서 만화가로, 만화가에서 스토리 작가로. 아빠 직업을 반복해서 정정하고 설명하는 일은 어린 내게 묘한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친구들의 호기심은 금세 식었고, 관심은 쉬는 시간 놀이나 급식 메뉴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내 서툰 말솜씨로 아빠가 ‘정체불명의 직업을 가진 어른’으로 축소되는 것만 같았다.
의사, 변호사, 사업가, 회사원, 선생님, 공무원, 소방관, 경찰관, 과학자, 군인—이렇게 수많은 직업이 명사로 세상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심지어 ‘무직’이라는 단어조차 직업의 부재라는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는데.
한 단어로 모든 설명이 완결되는 세계.
그러한 명확성이 아빠의 직업에는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내내, 아빠의 직업은 나에게 자랑거리인 동시에 끝내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새로 사귄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간호사인 친구 부모님께서 물으셨다. 피하고 싶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너희 아버지는 무슨 일 하시니?”
나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작가예요.”
“작가면, 소설을 쓰시니?”
수없이 들어온 질문에, 나는 어른에게 길게 설명하는 것이 어딘가 불편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화가예요.”
그 순간 친구 어머니의 얼굴은 미묘하게 변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내게서 살짝 멀어진 시선, 경직된 입꼬리까지. 그녀는 “그래… 놀다 가라”라고 짧게 내뱉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부엌으로 자리를 피했다.
찰나의 반응은 하나의 뚜렷한 장면으로 남았다. 그 반응에, 부끄러워한 적 없던 아빠의 직업을 어쩐지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빠가 스토리를 집필했던 만화가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지만, 아빠는 원작자로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스토리 작가보다 그림 작가가 주목받던 시대적 관행 때문이었다. 나는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봤다. 오로지 아빠의 이름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이름은 자막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서서히 알게 되었다. 스토리 작가라는 존재는, 세상에 있어도 없는 존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내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스토리 작가였다. 스토리 작가는―우리 아빠는 작가이긴 한데, 소설이 아니라 만화를 써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고 스토리를 만드는 일을 해요. 그래서 작가이기도 만화가이기도 하지만, 스토리 작가에 가장 가까워요―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다른 하나는 만화가로 마무리 짓는 길이었다. 단어 하나면 충분했지만, 사회적 편견을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 만화가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닌 것처럼 취급받았다.
아빠를 직업이라는 범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 아빠의 세계를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는 부조리였다. 이 부조리를 해명하는 일은, 부조리한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나에게 지치고 소모적인 일이었다.
설명할수록 더 멀어지고 정의하려 할수록 더 모호해지는 아빠 앞에서, 어느 순간 나는 자부심과 창피함이 뒤섞인 모순된 감정을 가슴 한편에 품었다.
모순은 모순되는 개념을 부정하면 쉽게 해결된다. 당시 나는 부조리와 모순을 본능적으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인 반쪽짜리 거짓말이었다.
만약 지금의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빠의 직업을 묻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우리 아빠는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빠는 세상에 아직 없는 단어로 불려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