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을 모르는 이들
술에 취했다가 눈을 떴을 때, 나는 과 동기인 남자 44와 꼭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억지로 끼워 맞춰진 모습이었다.
광경이 너무 기묘해서 눈을 돌리고 싶으면서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이 내 몸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언제 순결을 잃었니?”
그의 목소리는 조롱처럼 느껴졌다.
그 말 한마디에 그는 책임을 벗어던졌다.
나는 ‘여자가 조심했어야 한다’는 오래된 통념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의식을 잃은 나를 침범한 그의 행위는 명백한 성폭력이었고, 책임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는 구조 뒤에 숨고, 변명과 비아냥으로 맞섰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이해하려 애썼다. 혹시 그도 또 하나의 희생자일까,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자신의 분노와 상처를 직면하지 않기 위한 방어막이 된다.
이해하려는 마음은 본래 선하지만, 폭력 상황에서는 자신을 해치는 칼이 되기도 한다.
긴 시간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20여 년이 지나자 친구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자녀들을 다 키우고, 이제 좀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느 날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였다. 그날 모임에서 멀리서 보긴 했지만 말은 섞지 않았다.
전화번호부를 보고 연락했다고 했다.
그는 내가 가진 직장이 곧 자신의 기회라고 믿는 듯했다.
“네가 경제활동을 안 하고 있었으면 연락 안 했을 거다. 출판사 다닌다며?”
그의 말은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저지른 일은 나만 기억했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또 기회를 노렸다.
그에게 나는 여전히 감정 없이 소비해도 되는 대상이었다.
“지갑은 닫고 욕심만 들고 다니는구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다 결국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가 되레 말했다.
“너, 옛날이랑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 한마디는 내가 그때도 지금처럼 그를 단호히 거절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혹시 내가 술김에 그를 유혹한 건 아닐까 걱정하던 마음이 그의 말로 단숨에 정리되었다.
다시 20년이 흐르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과 친구들에게 부고를 알리자 따뜻한 댓글들이 달렸다.
그런데 그 아래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손끝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댓글을 달았다.
그 한 줄을 쓰는 데에도 손이 떨렸다.
그 떨림만으로도, 나는 여전히 피로 물든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걸 실감했다.
결국 상담전화를 걸었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털어놓았다.
결론은 분명했다. 그는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의식을 잃은 사람을 성폭행하고도 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
누군가에게 어떤 고통을 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다행히 그 후로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가 댓글을 구애의 신호로 착각했을 수도, 그냥 외면했을 수도 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더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침묵했다.
그날의 일을 꺼내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눌러 담아두기만 했다.
하지만 아주 느리게 그 상처를 입 밖에 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깊은 상처는 누군가의 사과만으로는 아물지 않는다.
아픈 일을 말로 꺼낼 수 있을 때부터 회복이 시작된다.
마음속에 뒤엉켜 있던 감정들에 두려움이나 외로움 같은 이름을 붙이면 그 일은 나를 계속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겪었던 일로 남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