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비 포옹 18화

나의 조건, 나의 침대, 나의 계급

보이지 않는 질서

by 몽돌이

– 홍길동의 시선에서 본 나

연세동

단독주택 3층. 방이 일곱 개, 화장실이 넷. 거실만도 아파트 한 채 만하다.

아버지가 물려준 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쉬운 대로 이 집 덕을 좀 보며 산다.

어느 여자가 와도 "와, 진짜……" 하고 감탄하니까.

그녀가 처음 우리 집에 왔던 날도 그랬다.

문을 열자마자 외쳤다.

“마당…… 진짜 넓네요.”

입꼬리는 비뚤어졌다.

감탄보단…… 약간 계급적 분노 같은 거?

질투? 혹은 자기 자리를 확인하는 습관적인 몸짓일까.


나는 의자를 권하면서 슬쩍 스캔했다.

그녀의 점퍼는 좀 해졌고, 가방은 소위 말하는 명품은 아니었으며, 신발은 닳아 있었다.

말로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지만, 그녀가 살아온 풍경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반지하에서 생을 시작했어요. 오늘은 당신 마음이 아니라, 당신 집을 보러 온 거예요.’


그 순간, 문득 겁이 났다.

혹시… 결혼하자는 걸까?

나는 사실, 연애를 위해선 집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은 다르다.

결혼은 조건이 아니라 '균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집이 있지만, 그녀는 뭐지?


그녀가 웃으며 내 주방을 보며 말했다.

"여긴 주방도 호텔 같네요."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은근한 점령 선언처럼 들렸다.

‘이건 이제 내 주방이야.’

그런 느낌이 불편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 자연스레 침대도 가까워졌지만 나는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기대하는 건 나의 감정이 아니라 증명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끝은 예상보다 빨랐고, 그 속도만으로는 상대를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날 밤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생각했다.

‘이게 내 침대, 이게 내 조건… 사랑마저 계급의 틀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어.’

확실한 건 이 시대의 사랑은 조건으로 시작하고, 성적 실망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 내 시선에서 본 홍길동

연세동의 마당넓은3층집, 홍길동의 우락부락한 얼굴, 그리고 침대에서의 짧은 순간까지—

나는 그것을 계급과 조건, 성(性)의 역전된 감각으로 관찰했다.

여자의 눈으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해석으로, 조용히 그리고 날카롭게.


홍길동의 집은 예상보다 컸다.

마당에는 오래 묵은 감나무가 있었다.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내가 너무 멀리 왔나?'

이런 집에 사는 사람과 반지하에서 시작한 내 생활은 같은 테이블 위에 놓이기 어려웠다.

나는 그의 공간과 나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법칙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우쭐하며 집을 소개했지만, 그 자신감은 침대에선 곧 사라졌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물을 가져오고 담요를 덮어주며 내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나는 단지 한 남자의 성적 실패 앞에서 당황한 여자가 아니라 ‘남성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짓된 남성성의 신화에 나 자신도 끌려 들어간 희생자였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단지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연세동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계급적 거리감 속에서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결말이었다.

“사랑받을 자격 없음”을 판결받는 듯한 그 무력감은 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 전체가 만들어 놓은 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연희동 집은 컸고, 침대는 짧았으며, 관계는 싸늘했다.

그는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만으로는 진짜 관계를 만들 수 없었다.

나는 그 질서를 조용히 등지고 걸어 나왔다.

‘이게 나의 계급이고, 이게 그의 침대이며, 이게 우리 시대의 사랑이다.’

keyword
이전 17화아주 느린 해방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