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보다 더 아픈 침묵
상담을 이어가던 중 상담사가 갑자기 내 말을 끊고 물어봤다.
“왜 이 항목은 그냥 넘어갔죠?”
“아, 그건 별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상당히 큰 상처 같아요. 좀 더 깊이 이야기해 보죠.”
그 항목은 바로 남자 2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그저 스쳐간 인연이나 가벼운 오해 정도로 넘기려 했다.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 기억을 말로 꺼내는 순간 이미 치유는 시작된 겁니다.”
역시 전문가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마음 깊숙이 가라앉은 커다란 돌덩이였다.
그는 내 친구 오데미안의 애인이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두 사람이 헤어지고 있었을 때였다.
둘이 끝났다고 해서 감정이 끝난 건 아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한동안 그들 사이를 서성였다.
그가 나를 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 나를 보아줬으면 하고 바랐다.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
어딘가 바보 같고, 지나치게 순정적이고, 그리고 되게 비현실적이다.
그는 내가 가장 어이없게 오래 끌었던 남자다.
사귀지도 않았고 고백도 없었.
정확히 말하면 나 혼자 착각한 거라고 넘기기 딱 좋은 서사다.
대학 졸업식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 왔어?”
다음날 내가 묻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루 종일 버스를 탔어.”
그 한 문장이 모든 걸 끝냈다.
변명도 미안함도 없었다.
그저 자기감정에 충실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여자는 그 감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모든 게 그날 때문이었다.
뒤풀이까지 끝난 밤 그녀는 혼자였다.
술이 취했고, 거리도 어둡고, 마음은 불안했고 그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무작정 그의 하숙집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남자 2를 만나러 왔는데요. 좀 불러주세요.”
그러나 문 너머로 돌아온 것은 싸늘한 야단뿐이었다.
“어떻게 젊은 여자가, 술까지 취해서, 이런 밤에 남자를 찾아옵니까?”
그 수치심과 모욕감,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녀는 단지 의지하고 싶었을 뿐인데 세상은 그녀를 경멸의 시선으로 몰아세웠다
.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거절당하고, 비난받고, 다시 상처받으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그를 향해 걸어갔다.
보슬비가 내리던 날 그는 말없이 내 머리 위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주었다.
그 손길은 따뜻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닫힌 채였다.
그녀는 그 손끝에서 희망을 읽고 싶었지만, 그의 침묵은 거절보다도 무거웠다
.
그는 끝내 오데미안이라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나는 선택받지 못했다.
그 모든 외면과 치욕 속에서도 나는 내 진심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간절히 붙들고자 했던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었다.
빗속의 젖은 소녀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상처의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을 건드렸던 그 거절조차 인생의 이야기가 되었다.
거절이 때로는 나를 지켜주는 문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거절은 나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언젠가 나 스스로를 더 단단히 세우게 만든 첫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