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라니 Mar 09. 2024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

막막한 룸컨디션과 무일푼


 마닐라 국제공항인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내렸다. 출발 전, 원장님께 로밍을 여쭤보니 필리핀 심을 사서 데이터를 사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아이들 수업과 내 수업이 있으니,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따로 로밍을 해가지 않고 필리핀 유심을 사기로 했다. 공항에서 와이파이가 된다고 해서 한국에서 입국당일 오후 6시부터 일시정지가 되도록 예약을 해놓았다.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은 인천공항보다 훨씬 작았다. 출국장으로 나가보니, 와이파이가 안 된다. 원장님이 보내주신 직원 사진과 동일한 사람은 안 보인다. 설령 근처에 있었다고 해도 과연 알아볼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긴장도는 높았다. 끊기는 와이파이로 카톡을 보냈다. 직원분이 밖에 있었는데 밖으로 나갈 생각을 미처 못했다, 어쩌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이들과 출구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을 지도. 안으로 들어온 운전기사 덕분에 드디어 어학원에서 보내주신 차에 올라탔다. 나중에 원장님 역시 나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하신 것을 확인했다. 원장님은 운전기사에게 나를 바꿔달라고 하셨다. 40분 정도면 도착한다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정중한 말씀을 하셨다. 긴장되는 마음이 슬쩍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닐라의 도로를 달리며 한국 연예인들이 전광판의 광고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신기했다. 낡은 건물들과, 높은 건물들이 공존한 도시. 한눈에 봐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건물은 창 밖에 길게 늘어선 빨래들이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아이들은 긴 비행이 피곤했는지, 낯선 도시의 모습에 긴장감이 높아졌는지 언제 내리는지 계속 물어본다. 엄마도 몰라. 엄마도 여기가 처음이야.


 저녁 6시 30분쯤 기숙사에 드디어 도착했다. 원장님과 부원장님 내외가 나오셔서 반겨주셨다. 그분들의 환대를 받기에 나는 너무 긴장상태로 있었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 드디어 온 건가. 오느라고 고생 많았겠다고 식사를 하라고 하신다. 지금은 너무나 좋아하는 메뉴인 Pork BBQ지만 그날은 돌을 씹어먹는 느낌이었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이들과 식사를 하고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원장님께 사전에 카톡으로 안내받은 방인데, 맞닥뜨리니 생각보다 막막했다. 우리 셋이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 거무튀튀한 가구가 채워진 방에서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2층침대가 2개 있고 그 사이에 놓인 책상. 빼곡한 옷장. 한 사람 몸이 들어갈 만한 샤워실 겸 화장실.

 공용화장실을 사용하는 줄 알았다가 개인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만 해도 살만하겠다고 원장님께 답문을 보냈는데, 막상 눈앞에 보인 방을 보니 앞으로 우리가 살 수 있을까 막막한 마음이 올라왔다. 캐리어 4개를 어디다 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정리를 했다. 아이들과 잘해보자 하는 의지를 뿜으며. 엄마인 내가 씩씩해야 아이들도 이곳에 잘 적응할 거라는 마음을 품었다.


 매주 토요일에 밴을 타고 SM north로 픽업서비스를 하시는데, 보통 1시 30분에 출발해서 7시쯤 돌아온다. 하룻밤 자고, 토요일에 쇼핑몰로 간다. 아이들과 힘들다고 서너 시간 동안 환전을 하고 생필품을 사서 돌아오라고 직원분을 따로 붙여주셨다.

 1시에 쇼핑몰로 출발했다. 어제 공항으로 픽업 나온 인턴인, 트레이시가 동행했다. 공항에서 픽업까지 와준 답례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함께 먹자고 제안했다. ATM기로 나를 데려다줬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줄 서 있었다. 트레이시와 함께 기다리는 것이 미안해진 나. 혼자 현금 출금하고 아이들과 쇼핑을 한 후 졸리비 앞에서 4시에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쇼핑몰 내 와이파이를 쓰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일단, 1만 페소를 인출하려는데 계속 오류가 났다. 무엇이 문제인지 별다른 정보가 없어서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과 슈퍼마켓에 가서 샴푸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 다시 현금 인출을 하러 갔더니 기계오류로 작동이 안 된다고 한다.

 와이파이는 무료지만 인증을 해야 사용할 수 있었는데, 한국 핸드폰으로는 인증이 안되었다. 트레이시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연락을 해야 하는데 막막했다.

  졸리비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아가씨에게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핸드폰이 안된다고 문자 하나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그 앞에서 팔고 있는 SIM을 구입하라며 자기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가 핸드폰의 데이터를 끄는 것을 보았다. 하, 이런 야박한 인심이 있나. 다른 사람들도 나의 부탁을 거절하겠구나 생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이번에는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핸드폰이 안돼서 문자 하나만 부탁한다고. 그녀는 기꺼이 통화하라고 전화를 건네주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며, 자기 회사 사장님이 한국 사람이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셨다.

  문자를 전송해 달라고 부탁할 때 가장 걸림돌이 컸던 것은 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유창하지도 않았고, 내가 제대로 묻는 것이 맞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저 사람이 나의 말을 오해할 수 있다, 못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밑바닥에 깔고 시작했으니 처음의 거절은 그런 내 마음을 확인하고 마음이 더 무겁게 했다. 바로 다음 사람에게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트레이시를 만나 인출이 안된다고 물었으나, 그녀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원래 약속했던 아이스크림을 사러 우리 셋과 트레이시는 젤라또 가게를 갔다. 먼저 나온 젤라또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우리는 다음 젤라또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젤라또는 나오지 않았다. 점원에게 물었다. 젤라또 2개아직 안 받았다고. 처음에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시간이 지난 후, 내가 3개 값을 지불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미안하다며 2개의 젤라또를 더 주었다. 긴장도가 높은 상황에서 예상을 벗어난 일이 생기니, 과연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만 한가득 안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가장 중요한 현금 인출을 하지 못한 채.

 기숙사로 돌아가서 아이들은 목이 탔는지 콜라가 먹고 싶다고 한다. 근처의 편의점에서도 알파마트라는 마트에서도 카드를 받지 않았다. 현금이 없는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녁 시간 내내 트래블로그 외화인출을 검색해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누군가 공항 BPI은행해서 출금한 블로그 포스팅을 보고, 원장님이 보낸 사람을 만날 생각만 했지 현금 인출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카드로 현금 인출이 안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한국에서 약간의 돈을 환전해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 무엇하리.

 아이에게 콜라는 엄마가 현금 인출하면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막막한 밤을 보냈다.

이전 02화 과연 비행기 탈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