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라니 Mar 11. 2024

무일푼, 믿을 수 없는 좋은 인연

암담을 희망으로 바꿔준 그녀 Ms. Clare  

 마닐라에 도착 후, 첫 일요일.

 아침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던 길에 복도에서 누군가 나에게 우리 아는 사이 아닌가요? 물어본다.

서울도 아니고, 한 번도 오지 않았던 마닐라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그녀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어디 사는지 지역을 말하다 나온 말. “생각났어 “

열 달 전에 우리 집에 2주에 걸쳐 인턴교육을 위해 강사로 방문하셨던 귀한 인연이셨다. 그때 단아하고차분한 모습을 보고,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그분이라니!! 넓고 넓은 세상에 이런 우연한 만남이 가능한 것인가??!!

 아이 둘을 데리고 어학연수를 왔다고 하니 용기가 대단하시다고 하신다. 나는 언니와 함께 마닐라로 어학연수를 오신 Ms. Clare가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내신 게 부러운데!

 이것도 인연이라고 기숙사 안 Social Hall에서 커피 한잔 하자고 하신다. 열 달 전의 만남에서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신 이야기를 하시며, 돌아오는 토요일에 한국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셨다. 어제 아이들과 마트에서 본 비싼 망고가격, 아이들에게 현지인들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어 시장을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시장에 한두 번 다녀오셨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시겠다고 하셨다.

 윤언니들과 시장에 함께 가기로 한 약속을 잡고,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어떻게든 현금을 인출하려고 하였는데, 역시나 요지부동. 다급한 마음에 트레이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편의점인데 현금 인출이 여기도 안된다고. 마침 근처라고 일부러 나를 위해 밖으로 나와준 그녀. 그녀가 와도 인출이 안된다. 금액을 낮춰서 해보자는 말에 금액을 5천 페소로 줄여서 인출해 보았지만, 역시나 안되었다.

 언니들과 시장에 가려면 돈을 인출해야 하는데 너무 막막했다. 연락처도 모르니, 약속을 취소할 수 도 없으니 답답할 노릇. 우연히 복도에서 한번 더 마주쳐서 현금인출을 못했다고 시장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말씀드렸다. 흔쾌히 괜찮다고 언니들이 사주시겠다고 같이 가자고 제안해 주셨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나 혼자 바깥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 어학당에 아는 지인이 없고, 대부분은 대학생들이라 아줌마인 나와 동행해줄리가 만무하다. 그런 나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언니들이 마닐라에서 경험한 것들을 알려주겠다고 귀한 일요일을 내어주셨다.  

 현금이 없으니 기숙사 앞 알파마트의 맥주도 그림의 떡이었다. 술을 잘 안 마시는 언니들은 기숙사 내 주류 반입이 안되니 맥주를 마실 좋은 장소가 있다고 알려주시겠다고 했다. 기숙사 앞에서 만나 우리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마트에서 나를 위한 맥주 3병을 사오신다. 나중에 알고보니, 병맥주 하나는 Teamango에서 마시라고, 캔맥주는 병따개가 없는 나를 위한 배려로 사오신 것이었다. 우아함을 뿜는 언니들의 배려가 마음을 울렸다.

 여기저기 지저분한 길과 주변의 낯선 풍경을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갔다. 외부에서 사온 맥주를 마셔도 흔쾌히 배려해주는 티망고라는 작은 스무디 가게를 알려주신다. 아이들이 좋아할 메뉴인지 고심하시며 감자튀김과 너겟을 사주셨다. 맥주를 한 캔 벌컥 마셨다. 공항에서 그 목이 타는 순간을 지난 후로 이틀 만에 마시는 맥주는 얼마나 꿀맛인지. 언니들은 산미구엘 중 어떤 맥주가 더 맛있는지 꼼꼼하게 알려주신다.

 테이블 앞에서 맥주와 주전부리를 먹고 있는데, 눈앞에 닭싸움이 벌어졌다. 처음보는 광경이다. 구걸을 하는 사람들, 맨발로 걷는 아이, 씻지 않은 사람들도 지나간다.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한국에서 태어난 걸 감사하다고 말한다. 언니들은 아이들의 말 하나하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귀 기울여 듣고, 코멘트를 해주신다.

 맥주 아지트를 알려주시고, 시장에 가는 길을 알려주러 함께 일어선다. 클레어언니는 첫째 손을 잡고, 나는 둘째 손을 잡고, 제인 언니는 우리를 뒤에서 지켜주시겠다고 뒤따라 오셨다. 가는 길에 더워서 첫째는 이미 진이 빠졌다. 한국에서도 재래시장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여서 그런지 힘들어했다. 나는 망고를 많이 사 올 욕심에 가는 길을 동영상 찍고 머릿속으로 기억하려고 애썼다.

 시장에 들어서서 언니들은 선생님께 배운 방법으로 손수 우리가 먹을 맛있는 망고를 골라 선물로 주셨다. 시장 중반쯤 가서 보이는 바나나 츄와 뚜론(Turon)도 맛보라고 사주신다. 학교 내 카페테리아가 뚜론 맛집이라고 15페소에 맛볼 수 있다는 꿀팁도 빼놓지 않고 알려주셨다.

 사실은 언니들도 시장방문이 한두 번에 불과해 긴장이 되었던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알려주고 싶은 것들을 최대한 알려주고 싶은 큰 마음이 보였다. 다른 길로 가는 길도 알려주려고 하셨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여기가 거긴가 생각을 되짚기도 하셨다. 아이들까지 대동한 나의 안전까지 염려하셨을테니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쉬운 여정이 아니었던 만큼, 나 혼자였다면 시장 가는 날은 기약하기 어려웠겠구나 짐작했다. 언니들은 긴장하신 것 같지만, 나는 즐거웠다. 이국적이고 사람 냄새나는 시장투어가 좋다.

 망고를 까먹을 칼이 없다고 하니, 방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서 가져다주신다. 아이들과 편하게 까먹으라고. 언니들은 정말 저에게 천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돈이 없어도, 맥주도 마시고, 다음날 마실 맥주도 선물 받고, 필리핀의 국민 간식 뚜론과 바나나 츄도 맛보는 횡재를 얻었다. 혼자 시장에 왔다면 몰라서 사 먹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귀한 언니들을 만나고 난 후, 암담했던 우리의 연수가 희망으로 바뀌었다.

첫째 아이의 선생님께서는 아이의 그림을 보고, 아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말을 건네주셨다. 그 뒤로 선생님이 더 아이를 신경 써주신 것 같았다.

클레어 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드립커피 만드는 도구를 주셨다. 스타벅스에 가서 핸드드립용으로 원두를 갈아오면 된다는 꿀팁을 주셨고, 원두까지 넣어서 주셨다. 아메리카노가 그리웠던 나에게 행복을 한가득 얹어주셨다.

  방 공기가 유난히 매쾌해서 매트리스를 들춰보니 곰팡이가 끼고 더러웠다. 방을 바꿔달라고 용기 내어 부원장님께 부탁을 드렸다. 바꾼 방에 언니들이 준 매트리스 커버를 깔고 나니, 이제 잘 자고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아이들은 뽀송뽀송한 기분이 좋아 이불 위에서 날개짓을 했다. 언니들이 귀국 날 이른 아침, 조심스레 방 앞에 둔 선물은 하류에서 중류로 급 신분상승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언니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아이들과 나는 행운가득한 첫 주를 시작했다.




이전 03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