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조선수군의 결의, 드라마 속 연인의 속삭임이 함께 흐르다
보령이라고 하면 대부분 대천해수욕장을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가 찾은 보령의 목적지는 조금 달랐습니다.
바로 조선 수군의 병영이자,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충청수영성이었습니다.
이곳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 해군 기지입니다.
전라좌수영에는 충무공 이순신, 경상우수영은 일본을 마주한 전략 거점이었죠.
그에 비하면 충청수영은 존재감이 다소 미미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가장 고달팠던 부대이기도 했습니다.
남쪽 바다에 왜구가 출몰하면 곧장 남해안으로 향했고,
북방에 여진족이 내려오면 충청수군은 육로로 이동해 북방 방어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항상 어딘가로 차출당하는 부대’였던 셈입니다.
현재의 충청수영성은 조선 수군의 수영성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한 성곽입니다.
복원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큽니다.
입구를 지나면, 아담한 돌담길과 깔끔하게 정비된 길이 반겨줍니다.
성벽 위로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이 촬영되었던 장소도 만날 수 있습니다.
배우 강하늘과 공효진이 해질 무렵 성 위를 걸으며 다정하게 다투던 바로 그 장면.
드라마를 보셨던 분들이라면, 그 장면을 떠올리며 걷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날 겁니다.
성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즈넉한 정자인 영보정(永保亭)을 만날 수 있습니다.
16세기 초에 세워진 이 정자는 명재상 백사 이항복과 실학자 정약용이
"경치가 아름답다"며 극찬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탁 트인 언덕 위에 세워진 정자에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이곳에 서 있자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마치 그 시절 병사들의 훈련과 함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보정 뒤쪽으로 이동하면,
고기, 채소, 술을 파는 시장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군영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이 삶을 이어가던 터전이기도 했던 것이죠.
그 당시 병사들과 상인들, 가족들이 함께 살았던 흔적을 상상하며 둘러보았습니다.
이처럼 충청수영성은 단순한 군사 요새가 아니라
삶과 방어가 공존하던 조선의 작지만 소중한 마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곳에는 빈민 구제를 담당했던 진휼청의 흔적도 남아 있으며,
곳곳에 조선 병영의 구조를 상상하게 하는 유적들이 자리해 있습니다.
단순한 유적지를 넘어 역사와 생활이 함께 흐르던 공간임을 보여주는 교육적 의미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충청수영성은 아마 많은 분들이 보령에 왔을 때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을 직접 걸어보며 역사 속 병사와 백성의 하루,
그리고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감정을 함께 떠올릴 수 있었던, 아주 인상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조용한 길을 따라 걷고, 영보정에 앉아 바람을 맞고,
복원된 시장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과거를 상상해 보는 그런 시간.
무언가를 ‘보고’ 왔다기보다는, 잠시 머물러 과거의 자취에 귀를 기울이고 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