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세탁소
본격적으로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이다. 초여름의 이른 아침, 햇살은 제법 뜨겁게 내리쬐지만 그늘 아래만큼은 여전히 시원하고 청량하다. 숲길을 걷다 보면, 코끝에 맺히는 풀냄새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싱그러운 초록 냄새에 햇빛에 바싹 마른 풀잎의 향이 스며든다. 그렇게, 봄의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이제는 잎과 줄기 사이사이 열매가 자라고 있다.
계절이 자연스럽게 흐르듯 삶도 그렇게 흘러가면 좋으련만, 나는 늘 그 흐름보다 앞서가려 애썼다. 결혼 이후,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무언가를 빨리 이뤄야 할 것 같았고,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강박이 생겼다. 가정을 돌보며 일도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나를 쪼개고, 갈아 넣으며 살았다. 그게 ‘성실’이고, ‘어른스러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웃음이 사라지고 내가 점점 멀어졌다.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나를 놓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한 일이 있다면, 그저 ‘걷는 것’이었다. 하루 20분. 성과를 따지지 않고,
수익과 연결되지 않아도 그 시간을 오롯이 나에게 주기로 했다. 숲을 걸었다. 바람을 맞고, 햇살을 받으며
이파리 사이로 비치는 빛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어느새 2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숲을 걷는 일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잃어버렸던 감각들을 다시 찾는 일이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풀잎의 색이 옅어지거나 짙어지는 변화를 알아채는 일. 그 작고 미세한 감각들을 다시 배우며 나는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녹음 속을 걷는 일은, 그늘지고 얼룩졌던 내 마음을 햇볕 아래 널어 말리는 일과 같았다. 어디선가 말라가던 내 마음에 초록이 다시 스며드는 시간. 빠르게 맺히는 열매보다 충분히 자라난 줄기와 잎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완벽하지 않다. 가끔은 다시 무너지기도 하고, 욕심이 앞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숲으로 간다. 조금 덜 조급하게, 조금 더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그곳에서 나는 다시 나를 널고 말린다. 햇살과 바람 사이에서, 내 안의 조용한 균형을 다시 찾는다.
녹음(綠陰)집 | Nokeumj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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